30일 저녁 홍콩 그랜드하얏트 호텔에서 열린 서울옥션의 경매 현장. 연단 중앙의 중국인 경매사가 모인 고객들 앞에서 단색조 그림의 주문을 권하자 한 고객이 손팻말을 들어올리며 응찰가격을 부르는 모습이다.
“9200만, 아니 9600만. 또 올라가네요. 9800만. 아 1억 넘겼어요. 어떡할까요? 응찰자가 또 붙었네요.”
휴대폰 붙들고 응찰고객과 급박하게 통화하는 경매사 직원들의 목소리가 드문드문 들려왔다. 31일 오후 홍콩섬 도심의 그랜드하얏트 호텔에서 잇따라 열린 케이(K)옥션과 서울옥션의 국외 미술품 경매 현장은 차분한 고객들과 경매 관계자들의 긴장된 분위기가 대조를 이뤘다. 특히 최근 국내 미술시장에서 블루칩(우량상품)으로 각광받고 있는 70~80년대 국내 원로작가들의 단색조 회화(모노크롬)가 국외 경매로는 역대 최대 규모인 120여점이나 출품돼 가장 큰 관심이 쏠렸다. 현지시각으로 이날 오후 1시 호텔 11층 회의장에 마련된 케이옥션 경매장과 오후 6시 호텔 2층 살롱에 마련된 서울옥션 경매장에는 100~150여명의 국내외 컬렉터와 화상들이 찾아와 응찰하거나 거래를 지켜보며 작품 낙찰가에 신경을 곤두세웠다.
단색조 회화의 잔치였던 이번 경매 대결은 애초부터 전망이 엇갈렸다. ‘지금이야말로 국제시장에 단색조 그림들을 충분히 공급해 일정한 가격대를 형성할 수 있는 호기’라는 전망이 경매사 중심으로 나왔지만, ‘수작과 태작을 뒤섞어 너무 많은 작품을 냈다’며 거품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적지 않았다.
30일 저녁 홍콩 그랜드하얏트 호텔에서 열린 서울옥션의 경매 현장. 연단 중앙의 중국인 경매사가 고객들 앞에서 단색조 그림의 응찰가를 부르며 추가 주문을 권하고 있는 모습이다.
실제 뚜껑을 열어본 결과는 낙관론에 손을 들어주는 쪽이었다. 예상했던 추정가보다 훨씬 높은 값을 응찰자들이 부르며 경합하는 극적인 양상이 도드라지지진 않았지만 두 경매사 모두 국내 미술계의 기대감에 맞춤하는 실적을 올렸다. 서울옥션의 경우 31일 밤 10시 넘어 끝난 이날 경매에서 2008년 홍콩 경매를 시작한 이래 최고의 성과를 올렸다. 낙찰률 92%에 거래액 140억여원으로, 국내 경매사의 외국경매 사상 최고 수치다. 출품한 단색조 회화 30여점이 모두 낙찰됐고, 정상화 박서보 윤형근 등 단색조회화 3대가의 대작들 낙찰가는 각각 3억과 6억, 7억원을 넘어서며 작가당 역대 최고값을 경신했다. 케이옥션은 서울옥션만큼 특기할 만한 기록은 내지 못했지만, 단색조 출품작들은 대개 추정가의 평균치 이상 가격으로 90% 이상 팔렸다.
개별작가로는 단색조 회화의 거장인 정상화 작가가 단연 돋보였다. 특히 서울옥션 경매에서 그의 대작과 소품들은 중국 컬렉터들의 유난한 관심 속에 추정가를 훨씬 웃도는 5억~1억원대에 모두 낙찰됐다. 작고 작가 윤형근의 작품들도 특정 외국 컬렉터들의 관심이 집중되며 추정가의 두세배 값에 거래가 이뤄졌다. 98억여원이 거래된 케이옥션 경매는 국민화가 박수근의 ‘목련’이 1200만 홍콩달러(약 17억1천만원)로 최고가에 낙찰됐다. 이동엽, 김기린 등 후발 단색조 작가들의 그림 상당수가 추정가보다 높은 값에 팔린 점도 눈에 띄엇다. 국내 시장에서 지난해 초까지 대작도 수천만원 정도였던 단색조 회화 작품들이 수억원대를 호가하면서 홍콩 시장에서 거의 모두 낙찰된 것은 나름 의미있는 성과라고 할 만하다. 외국 컬렉터들에게도 경쟁력 있는 미술상품이란 점이 입증됐다는 면에서 단색조 그림이 당분간 미술시장에서 흥행 동력을 유지할 것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미술 컨설팅 업체 운영자 박혜경씨는 “워낙 많은 물량이 나온 탓에 국내외 컬렉터들이 단색조 출품작들의 질과 내력을 신중히 따지며 응찰했는데도, 상당한 성과가 나왔다는 점에서 한국 미술품에 대한 외국 투자자들의 관심은 안정적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고 말했다.
서울옥션이 국내 경매사로는 처음으로 국외경매에 내놓은 조선백자, 민화 등의 고미술품들도 출품작 19점 중 한점을 빼놓고 모두 낙찰됐다. 핵심 작품으로 꼽혔던 ‘백자청화송하인물위기문호’는 950만 홍콩달러(13억5천여만원)에 팔려 서울옥션 장터의 최고가 작품이 됐다. 이응노, 김환기, 남관, 서세옥 같은 근현대기 원로 대가들 작품들 상당수가 두 경매사 매장에서 고액으로 낙찰된 것도 성과로 꼽힌다. 앞서 30일 오후 열린 크리스티 홍콩 경매에서는 산을 담은 김환기의 대작 ‘블루 마운틴’을 두고 치열한 응찰경쟁이 벌어져 화제를 낳았다. 이 작품은 시작 가격이 110만 홍콩달러(약 1억5700만원)였으나 40여차례의 가격 경합 끝에 10배가 넘는 1150만 홍콩달러(16억4500만원)에 낙찰돼 현지 관객들의 갈채를 받았다.
홍콩/글·사진 노형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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