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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음악·공연·전시

청춘의 미로, 출구가 없다

등록 2015-06-02 19:56

유목연 작가 ‘모험도감’ 전
카드빚 몰려 서울역 노숙자 경험
컴컴한 미로 같은 전시장 통해
희망 없는 청년세대 좌절 은유
‘도시 유목’ 삶 담은 가이드북도
전시장 벽에 작가가 끄적거린 그림과 글귀들.
전시장 벽에 작가가 끄적거린 그림과 글귀들.
이 전시장은 섣불리 들어가면 안된다.

앞과 옆, 사방이 깜깜하다. 미로 같은 통로는 좁고 각이 졌다. 길을 잃거나 발을 헛디디기 쉽다. 공포감에 빠져 입장한 걸 후회할지도 모른다. 서울 서촌 창성동 뒷골목 한 건물 지하에 있는 대안공간 사루비아다방의 ‘모험도감’ 전을 보려면 담력과 의지가 필요하다. 청년작가 유목연씨가 펼쳐놓은 전시장 들머리의 칠판에 ‘주의사항’이 적혀있다. ‘1.많이 어둡습니다 2. 머리, 다리, 옷 주의 3. 길을 잃어버리면 소리를 지르세요 4. 넘어질 수 있습니다 5. 본인 스스로가 자신을 지키세요’

주의사항을 숙지하고 들어간다. ‘모험의 시작’이란 글귀와 내부 지도를 그린 나무판을 보며 암흑 속으로 빠져드는 전시공간은 손으로 벽을 더듬으며 가야한다. 폐목들을 걸쳐 만든 벽체와 계단들이 28평 공간을 빙 둘러싼 통로는 버려진 골목길 느낌이다. 휴대폰 조명을 켰더니 작가가 닥치는대로 현실과 부대끼며 살아온 기록들이 통로 벽에 곳곳에 괴발개발 적혀있다. 돈벌려고 자전거를 훔치고 보건소에서 주는 두통약을 가루로 만들어 몽롱한 상태에 빠졌다거나, 권태스런 섹스의 경험담을 털어놓은 글귀들이다. 앞이 안 보이는 공간에서 벽체에 머리와 몸을 쿵쿵 부딪히거나 몸 하나 들어갈만한 통로 사이를 간신히 빠져나오면 눈앞에 가느다란 빛이 비쳐나오는 좁은 방이 나타난다. 합판과 폐목들을 붙여 만든 방, 한쪽 나무대 위에 철봉에 매달려 같은 동작만 끊임없이 되풀이하는 인형상이 섬뜩한 느낌을 낳는다. 나머지 통로를 돌아 가운데 방으로 가면, 희미한 전등불빛 아래서 박제된 비둘기와 쥐가 서로를 노려보며 싸우려하는 모습이 펼쳐지고 그 광경을 폐목으로 만든 높은 의자가 지켜보고 있다.

유목연 작가가 연출한 ‘모험도감’ 전시장의 통로공간. 나무조각들을 붙여 만든 허접한 계단과 난간들이 보인다.
유목연 작가가 연출한 ‘모험도감’ 전시장의 통로공간. 나무조각들을 붙여 만든 허접한 계단과 난간들이 보인다.
이 지하도시의 묵시록 같은 풍경들은 점차 분명해지는 느낌과 메시지를 전해준다. 칠판의 주의사항처럼 본인 스스로 자신을 지켜야하는 위험사회 한국의 자화상, 전망이 보이지않는 청년세대 혹은 청년작가들의 좌절과 불안에 대한 공간적 은유다. 비둘기와 쥐는 이 먹먹한 공간에서 생존을 위해 고투하는 청년 혹은 서민 군상이며 암흑과 폐목으로 만든 의자는 경쟁사회의 틀거지를 강요하는 기득권층의 음습한 시스템일 터다. 노숙 생활을 했고, 포장마차를 운영하며 몸을 부대껴 살아온 작가의 물컹한 현실 감각이 위험을 내포한 공간 자체로 솔직하게 드러났다는 점이 신선하다. 사진을 전공한 작가는 대학원 졸업 뒤 카드빚에 물려 서울역 지하공간에서 노숙자로 살면서 당시 그의 눈을 뒤덮었던 지하 터널의 기억을 되살려 작품을 만들었다고 한다.

유목연 작가는 노숙생활을 접은 뒤인 2012년 안산의 다문화 예술공간 리트머스에서 이동식 미니술집 ‘목연포차’를 운영하면서 미술판에 존재를 알리기 시작했다. 쇼핑용 카트 위에 조리설비 등을 장착해 놓고 라면과 계란 후라이, 술 등을 파는 이 포차를 통해 삶과 예술의 유목성을 실천한 그의 사회적 미술 작업은 서울 서교예술센터와 광주, 청주 등으로도 범위를 넓혀가면서 반향을 일으켰다. 이번 전시의 공간설치 작품 ‘모험도감’ 외에 함께 비치된 20종이 넘는 ‘도시유목가이드 북’은 이런 신산한 체험들이 쌓여 나온 산물이다. 공간설치 작업을 보고나서, 3명이 치는 원형 탁구대 디자인을 풀이한 ‘모두를 위한 핑퐁테이블’과 성 경험 고백기를 적나라한 체위그림들과 엮은 ‘성인색칠공부’, 포차제작과 운영법을 담은 가이드 북 등을 훑어보는 게 필수다. 유 작가의 이 근작들은 최근 미술판에서 소외된 청년작가들이 자생적 전시공간을 마련하고 청년세대의 미술담론을 제기하는 상황과도 맞물려있다. 작업 전망은 물론 생계조차 불투명한 청년작가들의 우울한 내면을 실체감있게 뽑아낸 것으로도 해석될 수 있는 수작들이다. 20일까지. (02)733-0440.

글·사진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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