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보드’ 연작
존 발데사리 개인전 내달 12일까지
짜깁기·훼손·배열 통한 작품 선봬
짜깁기·훼손·배열 통한 작품 선봬
현대미술판에서 작가들은 ‘슬쩍하기’를 잘해야 한다고들 이야기한다. 이른바 ‘차용’이란 전략인데, 사진, 영화 등의 대중적 이미지를 끌어와 작품 배경이나 창작 소재로 끼워넣는 것이다. 차용은 현대 산업화 시대 이래 영화, 사진의 발명으로 시각 이미지가 걷잡을 수 없이 쏟아진 변화와 얽혀 있다. 이미지들이 세상을 잔뜩 뒤덮게 되자 관찰과 재현만으로 작가들이 작업을 소화하기엔 역부족이었다. 결국 범람하는 시각물의 일부만 따와서 원본과는 전혀 다른 작가 나름의 의미를 붙이고 내 작품이라 주장하게 된다. 머릿속의 생각, 관념만으로 작품을 설정해버리는 ‘개념미술’은 이런 인식 변화가 낳은 산물이다.
현대미술에서 차용의 힘을 여실히 보여주는 미국 거장 존 발데사리(84)의 개인전이 서울 북촌 피케이엠 갤러리에서 열리고 있다. 발데사리는 50년대부터 사진과 문자 텍스트, 퍼포먼스 등을 통해 개념미술의 지평을 넓혀온 대가다. 대중문화, 고급문화의 전형적 이미지를 문자 텍스트와 맥락 없이 뒤섞거나 변형시키는 것이 그의 작업 특징인데, 서구의 패션, 영화 쪽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고 평가된다. 1970년 과거 그린 그림들을 불태우며 작품 창작 행위를 부정했던 ‘화장 퍼포먼스’로도 유명한 그는 2009년 베네치아 비엔날레에서 평생업적부문 황금사자상을 받았다. 이번 전시에는 잡지, 신문, 영화, 명화 등에서 짜깁기한 이미지들을 변형시키거나 일상의 이질적 풍경, 정물들을 함께 배열한 작업 등이 나왔다. ‘스토리보드’ 연작의 경우 일종의 의미잇기 놀이다. 얼굴보호구를 쓴 야구포수와 총천연색 차트의 사진, ‘사다리 옮기는 남자’란 문구 따위의 관계없는 이미지, 텍스트들을 엮어놓고 관객들에게 각기 다기한 상상을 하라고 권한다. ‘이중노트’ 연작은 마네, 고갱 같은 19세기 인상파 대가들의 그림 구석 후미진 이미지를 부각시키면서 대중가요 가사 등을 맞붙여 고급-대중 문화 사이의 변주를 빚어내기도 한다. 역대 영화, 다큐 등의 영상들을 합성한 미디어 문제작들의 마당인 코리아나미술관의 ‘필름몽타주’전과 같이 감상할 만하다. 7월12일까지. (02)734-9467.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도판 피케이엠 갤러리 제공
존 발데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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