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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음악·공연·전시

300년 풍상에도 고고한 사군자

등록 2015-06-15 19:46

조선 최고 묵죽화가 탄은 ‘삼청첩’
임란·호란 곡절 겪은 ‘전폭’ 첫 공개
중기 대가들 매화·대나무 그림서
단원·추사까지 100여점 전시
사군자 기획전 ‘매난국죽…’의 출품작들. 촉촉한 먹을 써서 댓잎의 싱그러운 분위기를 살린 표암 강세황의 ‘청죽함로’
사군자 기획전 ‘매난국죽…’의 출품작들. 촉촉한 먹을 써서 댓잎의 싱그러운 분위기를 살린 표암 강세황의 ‘청죽함로’
휭휭거리는 댓바람소리가 귀에 와닿는 듯하다. 바람에 맞선 대나무 네 그루의 잔 가지와 예리한 댓잎들이 짙고 엷게 묵바림한 화폭 속에서 너울거린다. 조선 최고의 묵죽화가로 추앙받는 17세기 화가 탄은 이정의 대작 ‘풍죽’은 한껏 고적한 자태다. 이 작품에서 시선을 옆벽으로 돌리면 밤하늘 별밭 아래 소슬하게 흔들리는 대숲 영상이 흘러간다. 탄은이 대숲 앞에서 느꼈을 정감을 떠올려 만들었다는 차동엽 작가의 미디어영상 ‘풍죽예찬’이다. 300년 세월을 넘나드는 옛 문인과 현대작가의 만남이 펼쳐지고 있는 것이다.

우리 옛 그림 보고인 간송미술관이 나름 변신을 꾀했다. 선비 문인화의 정수인 매화·난초·국화·대나무의 사군자를 현대 미디어아트와 함께 전시장에 내놓았다. 서울 동대문 디자인플라자(DDP) 배움터 2층 디자인박물관에 차려진 간송문화전 4부 ‘매난국죽 선비의 향기’다. 조선중기부터 말기까지 화가 31명이 그린 사군자 명품 100여점의 실물을 현대 작가의 미디어아트, 전시 해설 영상과 더불어 선보이고 있다.

탄은의 ‘풍죽’과 미디어아트의 만남처럼 이 명품전은 시대가 바뀌면 그림도 바뀐다는 진실을 새삼 일러주는 자리다. 감각과 상상력은 응당 시대의 변화를 좇아갈 수밖에 없다. 중요한 건 일관된 원칙과 유연한 감성이다. 진열장을 수놓은 16~19세기 숱한 선비, 중인 화가들의 사군자 그림들은 작가의 개성과 유행 등이 어우러져 시대마다 특유의 화풍과 필치가 개발되고 변모를 거듭했음을 드러낸다.

억센 잔디 같은 조선 난초의 강하고 거친 기운을 뽑아낸 추사 김정희의 ‘적설만산’.
억센 잔디 같은 조선 난초의 강하고 거친 기운을 뽑아낸 추사 김정희의 ‘적설만산’.
먼저 관객을 맞는 걸작은 ‘몽유도원도’와 더불어 한국 회화사 최고의 컬렉션으로 꼽히는 탄은 이정의 ‘삼청첩’이다. 탄은이 임진왜란 당시 왜군에 의해 팔에 큰 부상을 당하면서도 불굴의 의지로 검은 화면에 금물로 매화, 난초, 대나무를 그린 화첩이다. 작가의 지사정신이 꼿꼿한 필치로 스며든 걸작첩은 숱한 문인 묵객들의 제시, 글들이 함께 붙어있는 조선 중기 문화사의 정수다. 선조의 사위인 홍주원의 가문에서 병자호란의 전화를 딛고 지켜냈다가 구한말 일본 해군장교 손을 거쳐 간송 전형필이 곡절 끝에 소장하게된 내력도 예사롭지 않다. 특히 이번에 그림 20점과 탄은, 차천로 등의 제시가 붙은 전폭이 사상 처음 공개돼 더욱 뜻깊다.

고려중기부터 그려진 사군자는 조선 중기 묵죽, 묵매를 중심으로 크게 성행한다. 전시는 탄은의 작품을 시작으로 유덕장, 어몽룡, 조속 등 중기 대가들의 강직한 매화와 대나무 그림들을 거쳐 18세기 강세황과 심사정 양 대가에서 다시 꽃 피운 뒤 단원 김홍도, 추사 김정희, 운미 민영익 등으로 갈래를 쳐나간 사군자의 변천상을 차분하게 풀어낸다. 18세기 최고의 감각파이자 사군자의 거장이었던 심사정의 국화 그림 ‘오상고절’과 ‘묵죽’을, 역시 당대 사군자 거장으로 일가를 이룬 강세황의 작품과 나란히 비교해 볼 수 있게 해놓은 것도 각별하다. 후반부에는 예서체 필법으로 조선 란을 거친 잔디처럼 그리며 독특한 맵시를 뽑아낸 추사 김정희의 ‘적설만산’과 단원 김홍도의 시흥 넘치는 수작 ‘백매’를 볼 수 있다. 단원의 ‘백매’는 문인의 품격을 강조한 기존 사군자와 달리 스산한 듯 내키는대로 그은 가지의 필선과 발랄한 매화 꽃점의 묘사가 매혹적이다.

조선의 문인들은 내면을 보는 수양의 거울로서 사군자를 그렸다. 그러나 우리가 보는 조선 중기 이후 사군자 그림들은 시대에 따라 유동하는 필치와 구도를 통해 변화된 당대의 시각적 취향을 두드러지게 드러낸다. 법도를 저버리지 않으되 얽매이지 않는 상상력의 경지를 추구했던 것이다. 시류와 변신이 필수가 된 지금 시대에, 변화 앞에서 성찰의 경계를 곱씹었던 옛 화가들의 혜안을 엿보게 하는 이번 전시는 오는 8월30일까지 계속된다. (02)2153-0000.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도판 간송미술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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