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의 화제작 가운데 하나인 경기도 남양주 수종사 23불 가운데 일부불상들. 광해군에 의해 유폐됐던 인목대비가 인조반정으로 복권된 뒤인 1628년 조각승 성인을 시켜 만들었다. 아들 영창대군 등 정쟁에 희생된 일가족의 명복을 빌기 위해 조성된 작품이다
‘발원’으로 본 불교미술과 우리 역사
올망졸망 모인 23분 아기불상들은 살포시 웃고있었다. 지팡이 든 민머리 지장보살과 보관을 쓴 보살들, 왼손 검지 세우고 오른손으로 감싸쥔 비로자나불과 석가여래상 등이 나란히 앉아 천진난만한 얼굴을 빛낸다.
경기도 남양주 두물머리 절 수종사에 봉안됐던 이 미니불상들은 해맑은 자태로 눈길을 사로잡지만, 그 이면엔 권력다툼의 피바람과 궁중여인의 눈물이 숨어있다. 17세기초 광해군의 정적 인목대비가 광해군에 의해 살해된 부친 김제남과 아들 영창대군의 원혼을 기려 만든 것이 이 불상들이다. 앙징맞은 아기 불상들 얼굴마다 어린 나이에 비명횡사한 영창대군의 앳된 모습이 스쳐 지나가는 듯하다.
수종사 불상들은 서울 용산 국립중앙박물관 상설관 특별전시실에서 열리고 있는 기획전 ‘발원, 간절한 바람을 담다’(8월2일까지)의 전시장 깊숙한 안쪽에 있다. 불상들 근처 진열장에는 역시 인목대비가 아들과 부친을 잃은 뒤인 1622년 슬픔을 추스리며 꾹꾹 눌러쓴 불경(‘금광명최승왕경’)의 발원문과 필사본도 보인다. 인목대비가 한땀한땀 정성껏 자수로 연잎 줄기를 손수 수놓은 불경 표지가 피붙이 잃은 궁중여인의 깊은 상심과 원망을 절절히 전해준다.
부처에게 소원 빌며 제작 후원
왕실서 평민·노비도 참여 ‘대중화’
인목대비가 아들 원혼 기려 만든
‘수종사 아기불상’ 등 불교발원품
국립중앙박물관서 400여점 전시
이 기획전은 우리 불교미술의 역사를 움직여온 ‘발원’이란 주제를 처음 띄워올린 전시다. 통일신라 이래 고려, 조선시대까지 왕족과 관리, 평민, 노비를 비롯한 숱한 선조들이 부처에게 소원을 빌며 불교미술품 제작을 후원했던 역사를 400점이 넘는 실물들을 망라해 보여준다. 불교미술은 사실 공적 기금을 모으는 펀드레이징의 예술이다. 냉혹한 권력 유지, 찬탈의 드라마를 숨긴 왕실 발원 불화와 불경, 불상들이 있는가하면, 승려, 관리, 백성들이 합심 발원해 조성한 불상, 쇠북, 후령통(불상 뱃속에 넣는 공양물) 같은 공동체의 고결한 소망을 간직한 불교미술품들도 넘친다. 왕실 발원품의 경우 인목대비 유물 외에도 조선 최고의 여걸권력자였던 명종 모친 문정왕후가 왕가 번영을 빌며 조성한 경쾌한 필치의 ‘약사삼존도’와 인수대비가 아들 성종을 위해 발원한 불경 ‘불정심다라니경’ 등 치맛바람을 짐작할 수 있는 유물들이 많다.
국가나 왕실이 독점해온 발원이 대중화한 것은 13세기부터라고 한다. 발원문과 다기한 예물들을 불상 뱃속에 넣는 복장 공양으로 좀더 많은 이들이 불사에 참여할 수 있게 되면서부터다. 박물관 쪽이 조사를 거쳐 처음 공개한 금동아미타삼존불, 목조관음보살좌상 같은 고려시대 대중 발원 불상들은 독특한 양식적 매력과 더불어 그 안에 넣은 천 조각과 귀금속, 후령통 등이 복장공양의 기원과 흐름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지역 향리들과 백성들이 힘을 모아 발원한 쇠북이나 종 같은 불교공예품, 고려 무사들이 발원한 ‘나한도’, 사대부부인이 불사동참을 호소한 권유문과 금물로 그린 필사경 등 발원의 다채로운 양상들을 한눈에 볼 수 있다는 게 전시의 장점이다.
하지만 출품작들에 숨은 이야기들은 유난한 집중력과 눈품을 들여야 찾을 수 있다. 기획자인 미술부의 소장 학예사가 논문쓰듯 전시를 짠 탓이다. 불교미술 발원의 역사와 뒷받침하는 유물들을 시대별로 정리하는데만 신경을 쓴 게 분명해 보인다. 불교미술사를 잘 모르는 일반 관객들에게는 복잡한 설명과 너무 많은 유물들로 눈에 과부하가 걸리고 갈수록 관람은 고역이 될 수밖에 없을 터다. 국민들 보라고 만든 전시가 학계논문처럼 사례와 개념, 설명을 나열하는 틀에 갇히는 것은 모순이다. 오랫동안 기획전을 치러온 박물관의 고참연구관들이 이 중요한 전시에 관여하지 않았다는 것은 납득하기 어렵다.
불교미술의 색다른 세계를 이야기하는 기획전은 하나 더 있다. 사찰 내부 불교장식물들을 조명하는 서울 견지동 불교중앙박물관의 ‘불전장엄(佛殿莊嚴), 붉고 푸른 장엄의 세계’전(8월16일까지)이다. 불상과 석탑의 그늘에 가렸던 사찰 내 불단 장식물과 각종 의식에 쓰인 제례도구, 기물들을 영상을 곁들여 입체적으로 살펴보는 자리다. 불상 옆에 발원을 적는 패의 다양한 지역 양식들과 불화·불상을 싣는 가마인 ‘연’, 절 깃대인 각양각색의 당기 등의 유물들을 눈앞에서 차분하게 새겨볼 수 있다. 양산 통도사 경전상자(경궤)에 새긴 비천상 조각과 울산 석남사 법당 대들보에 매달렸던 ‘악착보살상’ 등이 강렬한 인상을 남긴다.
글·사진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사진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왕실서 평민·노비도 참여 ‘대중화’
인목대비가 아들 원혼 기려 만든
‘수종사 아기불상’ 등 불교발원품
국립중앙박물관서 400여점 전시
인목대비가 아들 잃은 자신의 한을 풀어줄 것을 발원하며 필사한 금광명최승왕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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