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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음악·공연·전시

12년만에 다시 연 핏빛 ‘씻김의 굿판’

등록 2015-07-01 19:22

사진 손준현 기자
사진 손준현 기자
[리뷰] 이윤택의 ‘문제적 인간 연산’
폐허다. 위태롭다. 구중심처 궁궐의 대들보는 쓰러지고 지붕은 무너졌다. 단청이 벗겨진 기둥은 기울었고, 무대도 기울었다. 무대의 위태로움은 인물의 위태로움이다. 한편에 놓인 왕의 보좌는 여염집의 것처럼 초라하다. 임금의 자리가 이토록 보잘것없다는 말인가? 누렇게 시든 대나무들은 빽빽이 늘어섰다. 20년 전 초연 때 대나무는 서슬 푸른 잎을 칼날처럼 세웠었다. 이윤택 연극에서 대밭은 생과 사, 현실과 이상, 실제와 환상을 가르는 경계다. 대밭은 귀신들의 공간이다. 셰익스피어의 <햄릿>에서 선왕의 혼령이 출몰하듯, 이곳 대밭에는 연산의 아버지인 선왕 성종, 억울하게 죽은 폐비 윤씨는 물론 온갖 혼령이 출몰한다.

1일 이윤택 대본·연출의 <문제적 인간 연산>이 12년 만에 다시 무대에 올랐다. 1995년 초연한 이 작품은 이번 공연에서 무대뿐 아니라 거의 모든 게 바뀌었다.

무대·춤·노래 초연과 달라
백석광 ‘춤’ 이자람 ‘노래’ 조화
현대성 부각시킨 의상도 눈길

먼저 춤과 노래다. 무용을 전공한 연산 역의 백석광이 특히 눈에 띈다. 손짓 하나, 걸음 하나도 춤으로 보였다. 춤이 몸말이 돼 얘기했다. 이윤택의 또 다른 연극 <혜경궁 홍씨>에서 사도세자를 맡았을 때부터 눈여겨보던 그 춤사위였다. 연산의 어머니 폐비 윤씨와 연산의 연인 녹수 역을 동시에 맡은 이자람은 소리꾼답게 노래로 관객의 마음을 움직였다. 실제 연인인 두 사람의 춤과 노래는 무대를 풍요롭게 했다. 그 가운데 압권은 폐비 윤씨의 혼령과 녹수가 함께 부른 이중창이었다. 저승에서 지상으로 노래가 흘러나온다면 저런 노래일까?

의상은 현대성을 극명했다. 한복의 선을 살리되, 현대 유럽 스타일을 본뜨는가 하면 내시의 복장은 차이나 칼라로 처리했다. 의상의 무국적성은 되레 현대성을 더 부각시켰다.

이 작품은 한마디로 죽음의 굿판, 씻김 굿판이다. 1991년 김지하 시인은 “죽음의 굿판을 걷어치우라”라며 강기훈 유서대필 조작 사건에 기름을 부었지만, 2015년 이윤택은 다시 한번 무대 위에 ‘죽음의 굿판’을 벌였다. 연산은 스스로 무당이 돼 죽음의 굿판을 이끈다. 연산은 훈구 신료들의 낡은 기득권과 유교 교조주의에 맞서 피바람을 일으킨다. “그래, 내가 무당이 되자. 내가 ‘왕 무당’이다. 하늘의 길을 막은 놈들을 내가 처리한다. 내가 무당이고 내가 미륵이다.” 연산이 잡은 대나무의 댓잎이 바르르 떨었다. 접신이다. 강신이다.

그럼 문제적 인간 연산의 ‘문제’는 뭔가? “연산은 과거를 극복하는 데 실패함으로써 미래로 나아가지 못한 인물이다. 과거에 대한 분명한 청산과 씻김이 이루어지지 않는 한 미래는 펼쳐지지 않는다. 이 연극은 490년 전 이야기이자, 아직 청산되지 않은 지난 시절의 문제인 동시에 앞으로 우리 시대가 풀어나가야 할 숙제이기도 하다.” 이윤택의 말이다.

그런데 모호하다. 이 작품은 정치적 알레고리를 다루지만, 현실정치를 직접 거론하지 않기 때문이다. 개혁의 열망이 사그라지지 않았던 1990년대 초연 때와 달리, 2015년 이 참혹한 보수의 시대에 관객은 이 연극에서 무엇을 느낄까? 다만, 내시가 권력을 농단하는 장면에서 이 정권의 ‘십상시 논란’을 떠올릴 관객이 있을지 모르겠다. 국립극단 제작. 1일부터 26일까지 명동예술극장. 1644-2003.

손준현 기자 dus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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