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항 속의 금붕어가 노닐듯 자연스럽게 춤을 춰야 한다. 발디딤은 구름 위를 걷듯 출렁이면서도 살얼음을 깨트리지 않을 정도로 사뿐사뿐 걸어가며 들숨, 날숨, 호흡을 함께한다. 한국춤은 무릎에서 나온다. 오금을 죽이는 무릎은 몸의 악기이고 호흡이며 춤이 저절로 살아나오는 숨통이다.”
최근 출간된 <조선의 마지막 춤꾼 이동안>(서해문집)에 나오는 이동안(1906~1995)이 생각하는 우리 춤의 본령이다. 이동안은 1784~1922년 138년 동안 존속한 전문예인 민간조직인 ‘재인청’, 그 가운데서도 가장 규모가 컸던 화성 재인청에서 책임자인 도대방을 지낸 조선의 마지막 춤꾼이다. 그가 췄던 화성 재인청 춤은 기본춤을 비롯해 승무, 태평무, 엇중모리, 신칼대신무, 도살풀이춤, 진쇠춤, 장고춤 등 다 열거하기조차 힘들다.
이동안의 춤은 ‘몸으로 쓴 역사’인 탓에 남은 기록이 없다. 역사민속학자 주강현 제주대 교수는 “이동안 춤의 이후 궤적은 오리무중이다. 뛰어난 춤꾼의 계보단절은 거대한 ‘춤 박물관’ 하나가 사라짐과 같다”고 했다. 음악에 악보가 있듯, 춤에는 무보(舞譜)가 있다. <조선의…>는 이동안이 몸으로 썼던 역사 가운데 태평무와 기본춤을 제자인 춤꾼 김명수(61)가 ‘김명수식 춤 표기법’으로 기록한 책이다. 지난 2일 한겨레신문사에서 그를 만났다.
“‘우리 춤의 기술·기교는 이것이다’하고 내놓을 기본춤이 부족한데, 선생님은 이 기본춤을 배우면 반은 배운 것이라고 했습니다. 다양한 나라의 무보 책을 공부하면서 우리나라엔 전혀 없는 실정이 아쉬웠는데 이렇게 무보집을 펴내게 돼 기쁩니다.”
이 책은 스승의 춤을 도제식으로 전수받은 김명수가 실연 사진자료를 바탕으로 1983년 완성한 무보집 <이동안 태평무의 연구>를 새로 다듬은 것이다. ‘김명수식 춤 표기법’은 장단마다 정간보(장단보), 구음, 서양악보, 춤사위 사진, 춤길 방향, 발디딤, 팔놀림으로 나눠 기록했다. 춤사위를 유지하는 시간이 얼마였는지도 한눈에 알 수 있다.
“선생님의 춤은 미륵 같았습니다. 바위같이 튼실하게 무게중심을 잡았지만, 정형화가 되지 않게 자유롭게 췄습니다. 200년 전 우리 춤의 원형을 담고 있어요. 선생님은 조선시대에 태어나 조선시대의 정신을 갖고 돌아가신 분입니다. 100% 만족하지는 못하지만 후배들이 이 무보로 춤을 배우고 이어갔으면 합니다.”
김명수는 발레와 현대무용을 공부한 뒤, 한국무용으로 들어선 특이한 이력을 지녔다. 이동안, 김숙자, 이매방의 춤과 장단을 사사하고 1980년 ‘김명수 현대무용’과 1982년 ‘김명수 전통무용’으로 데뷔했다. 미국으로 건너가 리몽과 마사 그라함 테크닉과 베시 쉔베르그 안무법을 공부했다.
그는 한국말과 한국춤이 밀접하다고 했다. “나 으 으으 으 니나노 나니 니나노 노…. 선생님은 이렇게 구음으로 장단을 가르쳤는데, 그런 전수법은 효과가 탁월했어요. ‘하나, 둘, 셋’으로 가르칠 때와 ‘원, 투, 쓰리’로 가르칠 때는 큰 차이가 나지요.”
김명수는 이동안의 장고춤을 1983년에 공연한 뒤 한 번도 추지 않았다. 하지만, 내년 이동안 선생 탄생 110주년 맞아 이 춤을 선보일 생각이다. 스승의 말년 춤 공연 영상도 가지고 있는데, 기회가 닿으면 공개할 예정이다.
김명수는 1990년 당시 남편 황석영 작가와 함께 북한을 방문했다. 홍정화 무용가동맹위원장, 박경실, 우창섭, 홍석중, 문예봉, 여연구 등 북한 문화예술인과 교류했다. 이후 1998년까지 일본, 독일, 미국을 떠돌며 망명생활을 했다. 현재는 서울에 살고 있다.
글·사진 손준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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