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종리를 찾아주신 관객 여러분 환영합니다.” 충북 단양군 영춘면 만종리 주민 일동이 내건 펼침막이 눈에 들어온다. 남한강 구비를 휘돌아 첩첩산중에 자리한 이 마을에 연극을 올리는 극장이 생겼다. 만종리 대학로극장. 이름이 좀 이상하다. 주민이래야 겨우 80명인 만종리 산촌에 웬 대학로? 하지만 이름은 기억을 품는다. 만종리 대학로극장(공동대표 정재진·기주봉)은 서울 대학로극장의 28년 역사를 기억한다. 치솟는 임대료를 견디지 못하고 지난 3월 말 폐관했던 대학로극장이 이곳에서 다시 개관했다. 만종리에 뿌리를 내리고 극장과 극단의 역사를 다시 쓰고자 한다. 15명의 단원이 귀촌 대열에 함께했다. 농사와 연극을 병행하겠다는 맵짠 각오다. 이곳에 온 지 4개월여, 정재진 대표는 요즘 슬슬 웃음이 나온다. “대학로에서 절망을 봤고, 만종리에서 희망을 봤다.”
■ 밭이 무대, 옥수수도 관객
지난 7월29일 오후 6시, 만종리엔 장대비가 쏟아졌다. 밭 한가운데 너비 12m 깊이 5m의 노천무대가 흠뻑 젖었다. 저녁 7시를 넘기자 거짓말처럼 비가 그쳤다. 단원들은 서둘러 무대와 객석의 빗물을 훔쳐냈다. 어둠이 내리고 불이 켜졌다. 산골 마을 연극의 막이 올랐다. 재개관 기념 연극 <노인과 바다>(헤밍웨이 원작, 김진만 연출)다. 15명의 관객 중에는 초등학생 남매 둘, 서울에서 온 중년 부부 둘이 포함돼 있다. 7월24일 재개관일엔 200여명이 몰렸지만, 이날은 평일이라 손님이 손에 꼽을 정도로 줄었다. 관객들 뒤에선 키 큰 옥수수와 해바라기가 연극을 지켜봤다. 수박도 흙 묻은 줄무늬 얼굴을 맞대고 쳐다봤다.
갑자기 비발디의 ‘사계’ 중 봄의 선율이 흘렀다. 전화벨이었다. “응 그래, 잘 갔어. 으응, 그래….” 주민들 대부분 연극을 처음 본다. 공연예절을 알 리 없다. 극단 쪽도 그리 타박하지 않는다. 주민들끼리 “연극 볼 땐 전화를 꺼두는 게 예의야!”라고 서로 지적할 때까지 기다릴 참이다.
높은 임대료에 3월말 끝내 폐관
정재진 대표 등 연극인 15명
충북 단양군 산골마을 ‘집단귀촌’
‘낮에는 농사 밤엔 연극’ 병행
재개관기념 ‘노인과 바다’ 올려
가을 공연 무대엔 주민도 함께
치솟는 임대료에 쫓겨 3월 말 폐관했던 서울 대학로극장이 7월 말 충북 단양 산골마을에서 ‘만종리 대학로극장’으로 재개관했다.
밤이 깊어지고 연극이 막바지로 치닫는다. 노인 역의 정재진 대표는 거대한 날치를 상어떼한테 빼앗기고 허탈해한다. 하지만 대사는 의연했다. “오늘도 포기하지 않고 꿋꿋이 가련다!” 지난 3월 대학로극장 폐관 당시 정 대표는 서울 홍대 산울림소극장 무대에 섰다. <고도를 기다리며>(베케트 원작, 임영웅 연출)에서 러키 역을 맡은 그의 목엔 밧줄이 걸려 있었다. 폐관 위기에 몰린 극장과 밧줄은 그의 답답한 심정을 상징하는 것으로 보였다. 하지만 이날 무대에선 그를 옥죈 밧줄이 사라진 듯했다.
단원들이 이곳에 온 건 지난 4월 초다. 만종리는 허씨 집성촌으로 노년층이 많다. 15명 단원이 합류한 뒤 마을에는 요즘 생기가 돈다. 김양수(51) 이장은 “연극을 처음 봤지만 뭔가 진실함이 느껴져요. 젊은 사람들이 많이 와 마을에 활기가 생겼고, 바쁠 때는 농사일도 거들어주고…. 다른 동네 사람들이 부러워하더라고요.” 단원들은 마을회관과 빈집을 수리해 거처하고 있다. 아침이면 문 앞에 오이나 호박 같은 부식이 놓여 있다. 주민이 두고 간 마음이다.
■ ‘주경야연’의 문화실험
단원들이 이곳으로 오면서 한 다짐이 있다. “낮에는 농사를 짓고 밤에는 연극을 하자!” 주경야연(晝耕夜演)이다. 보름 전까지 주민들을 도와 마늘과 양파를 캤다. 40일을 넘긴 가뭄 때는 함께 속이 새까맣게 탔다. 마을을 새로 디자인하자는 생각으로 8000포기의 해바라기를 심었다. 수박과 토마토도 길렀다. 토마토는 제대로 건졌지만 수박은 엉망이 됐다. 야외공연장 옆에는 반쯤 썩었거나 짓무른 수박들이 뒹굴었다. 껍질이 터져 붉은 속살을 드러낸 수박은 초보 농사꾼에게 시위를 벌이는 듯 보였다. 서툴기도 했지만 농약을 치지 않아 생긴 일이다.
하지만 앞으로 계획은 대추씨처럼 여물다. 내년부터 2000평(6600㎡) 땅에 우리밀을 심을 생각이다. 평당 1000원을 주고 땅도 얻어놨다. 수확물로는 ‘우리밀 피자’를 만들 계획이다. 허성수 총감독은 꽤 구체적이다. “우리는 미국의 피터 슈만 신부가 만든 ‘빵과 인형 극단’을 롤모델로 삼고 싶어요. 그 극단은 관객한테 빵을 나눠주다가 극단이 어려워지자 빵을 팔았는데, 연극을 만드는 데 든든한 버팀목이 됐어요.” 허 총감독은 이 마을 출신으로, 극단과 마을을 이어주는 튼실한 끈이다. ‘무농약 농사를 짓자’고 주민들과 약속했다. 논에 미꾸라지와 장어를 키워 병충해를 예방하고, 자라면 내다 팔 생각이다.
농사도 중요하지만 본업인 연극이 더 중요하다. 우선 하늘과 별이 보이는 100석 규모 극장을 만드는 게 목표다. 시점은 내년 가을로 잡았다. 밀양연극촌이 순수 연극인 마을인 데 반해, 이곳은 농사와 연극을 병행해 생계와 예술 두 토끼를 모두 잡을 각오다.
하지만 처음 지은 수박 농사는 엉망이다. 농약을 치지 않겠다는 고집 때문이다.
정재진 대표는 요즘 기분이 좋다. “1990년대 초·중반이 대학로 소극장의 황금기였지요. 1997년 아이엠에프로 된서리를 맞았고, 2004년 문화지구로 지정되면서 너나없이 극장을 차리자 소극장들이 쇠퇴하기 시작했어요. 대학로에서는 절망을 봤지만, 만종리에서 희망을 봤습니다. 요즘 이곳으로 옮기고 싶다는 극장들도 있어요.” 생각보다 일이 잘 풀린다. 단양의 극단 마당과 함께 이달 <연인, 두향>, 10월 온달 장군과 평강 공주를 다룬 <바람의 길>을 올리기로 했다. <바람의 길> 군중 장면엔 주민들을 출연시킬 예정이다. 만종리 대학로극장과 발맞춰 ‘만종리 마을배우’ 80명이 탄생하는 것이다. 재개관 공연은 9일까지. 010-7322-9252.
단양/글·사진 손준현 기자
dust@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