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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음악·공연·전시

매향리 상처 위에 핀 꽃, 절망을 기억하는 향기

등록 2015-08-19 19:49수정 2015-08-20 17:38

‘쿠니사격장 폐쇄 10돌’ 기념 사진전
국수용 작가가 찍은 매향리 섬의 폭격 표적물(2003년). 사진 국수용 작가 제공
국수용 작가가 찍은 매향리 섬의 폭격 표적물(2003년). 사진 국수용 작가 제공
불꽃놀이 같은 미군기의 매향리 농섬 폭격 장면. 사진 노순택 작가 제공
불꽃놀이 같은 미군기의 매향리 농섬 폭격 장면. 사진 노순택 작가 제공
한밤의 불꽃놀이인가. 흐릿한 섬 언덕에 폭탄이 떨어져 생긴 화염의 빛살이 부채꼴처럼 피어오른다. 2000년 당시 경기도 화성군 우정면 매향리 농섬의 미군 폭격연습장에서 사진가 노순택씨가 앵글에 담은 폭격 장면이다. 사진 속의 초현실적인 광경은 황홀하기까지한 미감을 내뿜지만, 관객들은 마냥 아름답게 바라볼 수 없다. ‘고장난 섬’이라고 작가가 명명한 것처럼, 매향리 섬과 해변은 반세기 이상 미군 폭격장으로 쓰이며 숱한 희생을 낳았던 땅이다. ‘매화 꽃향기 퍼진 동네’란 뜻과 달리 한국전쟁 이래 이땅에 진주한 미군이 남긴 생채기를 상징하는 저주받은 지명이 매향리였다.

사격장 반대시위 현장을 담은 노순택 작가의 ‘고장난 섬’ 연작들(2000년). 사진 노순택 작가 제공
사격장 반대시위 현장을 담은 노순택 작가의 ‘고장난 섬’ 연작들(2000년). 사진 노순택 작가 제공

노순택·국수용·정진호 등 6명
2000년-2015년 시공간 교차
미군 폭격이 남긴 생채기와
여전히 뒤틀린 마을 풍경 담아

2005년 주민들의 반대운동으로 이곳 ‘쿠니사격장’이 폐쇄된지 10주년을 맞는 올해 늦여름, 그 역사적 상처를 기억하는 사진전이 매향리에서 열린다.

화성시 주최로 23일 시작하는 매향리평화예술제 사진전 ‘못살, 몸살, 몽상’이다.

반세기 넘게 매일 600회에 달하는 폭격 연습으로 몸살을 앓았던 매향리의 지난날을 이야기하기 위해, 큐레이터 최연하씨 기획으로 방치된 옛 미군 기지 건물 곳곳에 시공간을 넘나드는 매향리 사진들이 내걸린다. 지역 민주주의 운동의 전범을 만들어낸 매향리 사격장 반대투쟁이 한창이던 2000년 언저리와, 그뒤로 10년이 지난 2015년 매향리의 시공간을 여섯명의 사진가가 여섯 가지 시선으로 교차시켜 풀어낸 것이 특색이다.

천장 높고 퀴퀴한 기운이 감도는 옛 미군기지 건물의 방에서 출품작가들은 저마다의 개성적 시선과 관점으로 매향리에 새겨진 폭격의 생채기들을 어루만진다.

폭격에 아들이 희생된 주민 이춘분 할머니의 모습(2000년). 사진 국수용 작가 제공
폭격에 아들이 희생된 주민 이춘분 할머니의 모습(2000년). 사진 국수용 작가 제공
우선 눈에 감기는 작품은 2000년 당시 주민들과 만났던 국수용 사진가의 기록이다. 50여년 전 16살 아들이 산에 나무하러 갔다가 폭격을 맞아 즉사하고, 그 충격으로 남편마저 화병으로 세상을 떠났으나 미군에게 항의 한마디 못하고 살아왔다는 당시 88살 이춘분 할머니의 눈물 밴 증언 장면이 가슴 저리게 다가온다. 혹성의 광야에 처박힌 듯 버려진 차량 등 폭격 표적물을 담은 사진들은 자극적이고 낯선 구도가 강렬하다.

매향리 폭격과 반대투쟁의 현장을 몽환적 구도로 포착한 ‘고장난 섬’ 연작의 노순택 작가, 삭막하고 건조한 시선으로 폭격 현장을 훑어내려갔던 강용석 작가의 사진은 매향리 상흔에 얽힌 가장 생생한 역사적 기록들이다. 노 작가는 2000년 찍은 흑백필름을 다시 스캔해 당시의 폭격 장면과 경찰 방패벽 앞에서 사격장 폐쇄를 절규하던 주민들 함성을 살려냈다. 강 작가는 해변의 탄피 더미와 파괴된 표적물들의 10여년전 잔해를 냉정한 시선으로 보여준다.

정진호, 이영욱, 윤승준 작가는 2015년 매향리 풍경과 사람들을 새로 찍었다. 이영욱 작가는 방치된 미군 시설에 남겨진 폐가구와 집기 등을 클로즈업하면서 50여년간 지속된 ‘쿠니의 기억’이 남긴 실체들을 살펴본다. 사진 속에 담긴 미군기지의 현재 모습은 얼핏 여전히 견고한 듯하지만, 희부옇게 잔상이 부서지는 이미지의 모순을 드러낸다.

정진호의 ‘이상한 바닷가’ 연작은 농사짓고, 꽃핀 마당에서 망중한을 즐기는 여느 농촌풍경 같지만, 어딘지 뒤틀리고 낯선 매향리 주민들의 일상을 통해 여전히 지속되는 정신적 상처를 보여주려 했다. 최연하 기획자는 “2000년 당시 매향리 주민들의 고통과 연대하지 못한 부채의식이 전시를 기획한 계기가 됐다”고 말했다. “매향리는 앞으로 평화생태공원으로 재개발될 예정입니다. 하지만, 폭격 당시 주민들의 절망과 고뇌를 지금 시점에서 들여다보며 옛 상처를 성찰하는 과정이 먼저 필요하지 않을까요. 그게 전시가 던지려는 메시지입니다.”

29일까지. 개막일인 23일에는 오후 4시부터 참여작가, 관객, 주민이 함께 하는 ‘매향리 평화의 밤’ 행사가 열린다.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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