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호의 1959년 작 ‘오후의 잡담’. 50여년전 홍콩 서민들의 분주한 일상을 빛과 그늘이 대비되는 극적인 구도 속에 포착한 작품이다. 도판 신세계 갤러리 제공
홍콩 사진가 판 호 국내 첫 개인전
영화 ‘옥보단’ 감독으로 잘 알려져
홍콩의 일상 무대처럼 재구성한
50여년전 찍은 초창기작 27점 전시
영화 ‘옥보단’ 감독으로 잘 알려져
홍콩의 일상 무대처럼 재구성한
50여년전 찍은 초창기작 27점 전시
왕자웨이 감독의 <화양연화>(2000)는 60년대 홍콩의 어스름한 골목길이 떠오르는 영화다. 신문기자 량차오웨이(양조위)와 치파오를 즐겨입는 유부녀 장만위(장만옥)의 못다한 사랑이 더욱 잔잔하게 기억되는 건 그 시절 홍콩 도시공간 깊숙한 곳까지 섬세하게 옮겨낸 미장센(배경)의 매력 덕분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영화의 추억과 겹쳐지는 50여년 전 홍콩 구석구석을 담은 사진들이 또다른 화양연화의 감흥을 선사한다. 서울 회현동 신세계백화점 12층 갤러리에 개점 85돌을 맞아 차려진 홍콩 원로사진가 판호(85)의 국내 첫 개인전이다.
중국 상하이 출신인 판호는 홍콩에서 오랫동안 영화감독과 배우로 일하면서 사진을 찍었다. 국내에는 <옥보단> 같은 에로물 감독으로 알려져있다. 하지만 영화는 생업이었고, 예술적 갈망을 푸는 매체로 열정을 쏟은 건 사진이었다는 게 그의 회고다. 실제로 전시장에 내걸린 작가의 초창기 사진 27점은 다큐와 실험사진의 경계에서 독특한 미감을 내뿜고 있다.
출품작들은 중국 본토에서 이주민들이 밀려들던 격변기 홍콩의 일상을 무대처럼 재구성한다. 눈부신 햇살이 홍콩의 건물과 대지를 어루만지며 빚는 음영 속에서 자잘한 삶을 꾸려가는 군상들이 오간다. 내려다보는 시선 속에 들어온 거리의 행인과 아이들은 건물 그림자 틈새 사이를 걸어가거나 꼭지점 부분에 서 있다. 콘크리트 외벽에 사선의 그늘이 드리워질 때 그늘 끝부분에 여인이 서있는 순간을 붙잡은 ‘다가오는 그늘’은 유명한 대표작. 면 분할된 추상화 같은 느낌이다. 판호의 앵글은 서민촌이나 시장의 극적인 풍경들도 주시한다. 어둠 속에 빛이 스며드는 계단 위로 전통복을 입은 서민들이 잡담하거나 흘깃 눈길을 주며 지나치는 모습이 강렬한 이미지로 남는다. 세상이 무대이며, 삶 자체가 연극이라는 해묵은 진실을 새삼 환기시키는 작품들이다. 1963년 작가가 홍콩의 빌딩 숲 거리와 시장을 산책하면서, 그 안에서 벌어지는 사람들의 갖가지 움직임들을 쟁여넣은 30분짜리 동영상은 실험성과 현장성이 어우러진 그만의 사진미학을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결정적 순간’으로 유명한 프랑스 사진 거장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의 영향을 받았다는 작가는 “맘에 드는 장소를 고르면 밤낮으로 가서 기다리다가 어떤 이야기의 정수가 포착되는 순간을 담았다”고 말했다. 대학에서 문학을 전공하다 지독한 두통으로 학업을 접었고, 그뒤 거리를 떠돌다 지루한 마음에 카메라 잡고 이것저것 찍다보니 사진의 길로 들어서게 됐다고 한다. 11월22일까지. (02)310-1921.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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