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브 & 스케일’ 전시장. 떨어져나온 유리 문짝들을 불안한 구도로 잇따라 포개어놓은 이수성 작가의 설치작업이 보인다. 가운데 안쪽에 보이는 영상은 정금형 작가의 작업으로, 자신의 출품작 준비 과정을 그대로 찍어 보여준다.
작품 준비과정과 전시뒤 운명 등
‘미술품의 일생’ 생생하게 보여줘
‘미술품의 일생’ 생생하게 보여줘
명작이든 범작이든, 미술품들의 탄생과 종말은 관객 앞에 거의 드러나지 않는다. 우리들이 전시장에서 보는 건 대개 완성된 작품들이다. 작품들이 만들어지는 것 자체가 작가만이 겪는 고독한 사투의 과정이므로. 전시된 뒤 작품이 맞는 운명도 마찬가지다. 미술관으로 가지 않는 한, 개인 수집가에게 팔리거나 작가가 보관 또는 폐기하는데, 전시가 아니기 때문에 관객들은 후일담을 알기 어렵다. 그러니까 대다수 사람들은 한 미술품의 일생에 대해 사실상 단편적인 부분밖에 볼 수 없는 셈이다.
서울 자하문로 통인시장 옆에 있는 한옥집 전시공간 ‘시청각’에 가면, 작품의 역사와 단절된 관객의 한계를 곱씹게 만드는 기획전을 만나게 된다. 이달 초 시작된 소장 작가 8명의 기획전 ‘무브(MOVE) & 스케일(SCALE)’전이다. 이 전시는 ‘작품의 생애주기와 움직임’이란 주제 아래 구상, 제작 등의 작품 준비 과정과 작품의 규모, 전시 뒤 처분 등에 대한 작가들 각각의 개성적인 관점과 고민들을 짚어 보여준다.
단연 눈을 잡아끄는 작품은 춤꾼 출신의 여성작가인 정금형씨의 영상물들이다. 자신의 설치작품들을 상자에 싸고 포장하고 풀고 운송차에 싣는 과정 전반을 그대로 비디오로 찍은 작가의 이 영상 작업들은 전시장 이면의 공간에서 벌어지는 작가와 조력자들의 고달픈 노동을 생생하게 드러내고 있다. 이수성 작가는 전시공간 시청각의 임대계약서와 내부 구조도, 열쇠 등을 액자에 담아 걸거나 전시장의 유리 문짝들을 겹쳐 포개놓는 설치작업들을 통해 작품이 펼쳐지는 공간적 환경 또한 작업의 일부임을 일러준다. 컨테이너 가건물을 운반하기 편한 시트지에 정교하게 채색해 그린 김지은 작가의 그림은 얼핏 극사실적인 이미지로 보이지만, 실은 쌓여가는 작품의 보관과 처분을 놓고 고민하는 미술가들의 딜레마를 은유하고 있는 작품이다. 폐기해버린 작품이 담긴 도록을 액자에 넣어 선보이며 요절한 작품의 기억을 전해주는 김민애 작가의 ‘남은 건 도록’에서는 작가의 재치와 애잔한 감상이 함께 느껴진다. 디자이너 팀 ‘디자인 메소즈’는 3디(D)프린터로 말쑥하게 뽑아낸 플라스틱 장식등을 선보여 구상이 바로 작품으로 탈바꿈하게 된 작품 창작환경의 변화상을 보여주기도 한다.
출품작들은 모두 과거의 여러 공간들에서 왔지만 지금 처한 상황은 제각기 다르다. 작가의 착상이 더욱 발전해 미래의 신작으로 가지를 쳐나가는 작품들이 있고, 이미 수명을 끝내고 박제가 되거나 머릿속 구상으로만 맴도는 것들도 있다. 앞으로도 관객들이 힘겹게 태어났다가 허망하게 사라지곤 하는 미술품들의 일생을 온전히 짐작하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작가들의 상상력은 어떤 제약과 조건 속에서도 끊임없이 움직이며, 한결같이 자유로운 상태를 갈구한다는 것을 전시장의 작품들은 대변하고 있다. 11월14일까지. (02)730-1010.
글·사진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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