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법을 지키는 사천왕상 연작의 일부인 ‘마음을 일으키다:남방증장천왕’. 사진 노형석 기자
세번째 일본전…까다로운 공모 통과
일본 규슈섬 최대 도시 후쿠오카 도심의 나카가와 강변에는 방대한 아시아 근현대미술컬렉션으로 유명한 아시아미술관이 자리잡고 있다. 22일 낮 이 명문 미술관 8층 전시장이 현대미술품 같은 한국 소장작가의 불화 신작들로 수놓아졌다. 맑은 물 담은 정병, 세상에 불법의 향을 흩뿌리는 향로의 원색 이미지와 사람들의 마음을 담은 연꽃덩이 조각에 모두가 하나되는 불이(不二)의 세상을 만들자는 발원을 담은 작품들이다. 전시의 주인공은 올해 일본 에히메현 미술관과 치바 사쿠라미술관에서 잇따라 현대불화 전시를 열어 주목받은 이수예(43)작가다. 발원과 깨달음을 주제로 이날부터 시작한 전시는 일본 중견작가들도 전시하기가 쉽지않다는 미술관의 까다로운 공모 과정을 통과하며 성사돼 의미가 더욱 각별해 보인다.
이땅 전통 산사의 공간들을 현대적인 불화도로 풀어놓으며 지혜의 길을 이끄는 전시구성이 색다르다. 들머리는 눈알을 부라린 불교 수호신 사천왕 4분의 부리부리한 얼굴상 그림이 그들이 가진 탑, 칼, 용 등의 지물그림과 함께 지키고 있다. 절집의 시작인 천왕문의 회화적 재현이다. 이 상을 흘끔흘끔 쳐다보며 안으로 들어가면, 중생과 보살이 배를 타고 깨달음의 강을 건너는 반야용선도와 어두운 복도에서 빛을 향해 가는 한 사람의 그림이 연꽃송이 조각들에 둘러싸여 물결처럼 흘러가는 그림설치 작업들이 나타난다. 깨달음의 공간으로 가는 사찰의 공간구성 원리를, 자연스러운 마음의 흐름과 이를 상징하는 여러 설치작업들을 통해 빚어낸 셈이다. 서양의 트럼프 놀이에서 나오는 다이아몬드, 스페이드, 하트, 클로버 무늬를 우리 전통의 오방색 개념으로 엮어 단청 등의 문양으로 내부를 채워넣은 이색 소품 그림도 기둥에 내걸렸다.
작가는 수년간 미황사 괘불 등의 전통부활 대작을 모사하는 복원작업으로 필력을 쌓아왔다. 그는 이제 한걸음 더 나아가 상상력이 울렁거리는 현대미술의 한 영역으로 불화를 끌어들이고 싶다고 말한다. 교리나 지식으로 반복해 그리는 불화가 아니라 마음공부와 수행으로 얻은 깨달음과 조형적 욕구를 기반 삼아 고려, 조선불화가 아닌, 설치와 매체 작업 등을 오가는 대한민국 불화를 그리겠다는 욕심이다. “최근 경기도 청평 절에서 며칠 간 면벽수행을 하면서 마음공부를 한 뒤로 새로운 창작 불화에 대한 갈망이 더욱 깊어졌다”고 했다.
발원의 마음을 상징하는 오방색 화면 색깔이 그대로 정병, 향로, 탑 등의 이미지에 배어나오는 ‘색즉시공’ 연작은 이런 작가의 패기와 의지가 단적으로 반영된 작품이다. 과거 후쿠오카에서 희생된 조선인 징용자들의 발원까지 떠올리며 색조와 이미지를 고심해 만들었다고 한다. 하지만, 여전히 지식과 감성, 의미와 상상 사이에서 미숙한 빈틈이 많은 그림이라고 그는 솔직하게 한계를 털어놓았다. 27일까지.
후쿠오카/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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