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전원일기'의 현모양처에서 영화 <마더>의 아들을 위해 살인하는 엄마까지, 배우 김혜자에겐 늘 ‘어머니’라는 꼬리표가 따라다닌다. 그는 ‘국민 엄마’이지만 ‘아프리카 어린이의 엄마’이기도 하다. 1년 만에 무대에 서는 연극 '길 떠나기 좋은 날'에서도 어머니이자 아내를 연기한다. 지난달 26일 서울 성북구 삼선동 연습실에서 김혜자가 대본을 들고 기자의 질문에 답변하고 있다. 그는 인터뷰 내내 대본을 손에서 떼어놓지 않았다. 탁기형 선임기자
khtak@hani.co.kr
“<전원일기>는 인생을 가르쳐준 드라마에요. 한국 여자들이 살아야 할 도리를 알려줬어요. 그러다 시대가 바뀌면서 변화하는 엄마들을 연기했죠. 순종적이고 헌신적인 엄마를 하다가, 가출·이혼·탈선하는 엄마도 하고, 하다 하다 아들을 위해 살인하는 엄마까지 했죠.”
<전원일기>의 현모양처에서 영화 <마더>의 아들을 위해 살인하는 엄마까지, 배우 김혜자(74)에겐 늘 ‘어머니’라는 꼬리표가 따라다닌다. 1년 만에 서는 연극무대 <길 떠나기 좋은 날>에서도 어머니이자 아내 역할을 맡았다. 최근 서울 대학로 인근 연습실에서 그를 만났다.
1년만에 다시 서는 연극무대서
가족 버팀목 되는 어머니역 맡아
공연 앞두고 하루 6시간씩 연습 몰두
손때 묻은 대본엔 고쳐쓴 흔적 빼곡
“연구 못하는 쪽대본으론 연기 못해”
이 작품은 절망에 빠진 남편 서진, 남편에게 희망이 돼주는 아내 소정, 두 사람의 딸 고은이라는 세 가족의 애환을 시적인 언어로 그렸다. 김혜자는 어떤 불행도 이겨내며 남편과 딸의 버팀목이 돼주는 소정 역을 맡았다. “축구 선수 하다 다친 서진을 간호사로서 격려해, 꽃 사진작가로 만들어요. 하지만 마지막에 소정은 암이 걸려 임종을 맞기 위해 수녀원으로 갑니다. 고통스러워하는 걸 남편이 보면 힘들어 할까 봐 그런 거죠.”
대본과 연출을 맡은 하상길(67)은 1969년 실험극장에서 연극 <유다여 닭이 울기 전에>를 본 뒤 김혜자의 열렬한 팬이 됐다. 김혜자는 텔레비전 드라마와 영화를 오가며 바쁜 와중에도 연극의 끈을 놓지 않았다. 지난해 모노드라마 <오스카! 신에게 보내는 편지> 때는 하루 10시간씩 연습했다. 2시간을 혼자 끌고 가는 모노드라마로, 10살에서 70대까지 11개 역할을 소화했다. 요즘은 <길 떠나기 좋은 날> 무대를 코앞에 두고 하루 6시간씩 연습에 몰두한다.
“연극은 늘 공부가 돼요. 한 대본을 끊임없이 석 달은 볼 수 있잖아요. 박사학위 받는 것이나 같아요. 논문 한 편 쓰는 것처럼 얼마나 연구를 많이 하겠어요. 극중 인물과 동화해 그 인물이 되지 않고서 어떻게 무대에 서나요?”
대본을 석 달 숙성시켜 자기 것으로 만드는 배우다 보니, 쪽대본(촬영 당일 급하게 나온 대본)으론 절대 연기를 못 한다. “아무리 기가 막힌 사람이 썼어도, 저는 그거 못해요. 배우한테 연구할 시간을 줘야지. 그런 드라마 잘되는 거 못 봤어요. 그게 용인되는 시대가 됐지만, 그건 사람들이 무뎌져서 그래요. 드라마만 그러나요? 모든 분야가 다 그렇죠.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에요.”
텔레비전과 달리, 연극 대본은 배우의 의견을 반영해 ‘공연 대본’이 되기도 한다. “자기가 쓴 것을 연출하니까 ‘이거는 이렇게 하는 게 어떨까요’라고 연출한테 의견을 말하면 그분도 받아들일 건 받아들여요. 아름답고 희망적인 얘기로 고쳐가더라고요. 그래서 더 연극이 좋아요.” 김혜자의 대본엔 붉은 펜과 검은 펜으로 고쳐쓴 흔적이 빼곡하다. 닳고 손때 묻은 대본은 맡은 배역 ‘소정’과 일심동체가 되는 과정이다. 그것은 또한 배우 김혜자의 자존심이기도 하다.
배우로서 평생 행복했지만, 개별 작품에서는 천국과 지옥을 오간다. “연기가 잘 안 될 때는 지옥이에요. 텔레비전의 경우 내가 잘 못한 날엔 ‘오늘 밤 정전됐으면 좋겠다, 사람들이 못 보게’라고 할 정도였어요. 텔레비전에선 나 때문에 자꾸 다시 찍어달라고 못 하잖아요.”
배우 김혜자는 ‘국민 엄마’이지만 ‘아프리카 어린이의 엄마’이기도 하다. 1992년부터 굶주리는 아이들을 돕고 있다. 그 활동을 기록한 책 <꽃으로도 때리지 말라>(2004년)는 30만부 이상 팔렸다. 10억원에 이르는 인세는 고스란히 월드비전 통장으로 입금된다. 연극 <길 떠나기 좋은 날>은 오는 4일~12월20일 서울 이화여고 100주년 기념관 화암홀에서 공연한다. (02)765-8880.
손준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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