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씨고아, 복수의 씨앗'. 사진 국립극단 제공
리뷰 l 연극 ‘조씨고아’
복수의 씨앗 거둔 가혹한 운명
뛰어난 연기·서사로 사로잡아
복수의 씨앗 거둔 가혹한 운명
뛰어난 연기·서사로 사로잡아
조정의 중신인 ‘조순’은 정적 ‘도안고’(장두이)의 계략에 빠져 역적으로 몰리고, 일가 300명이 멸족되는 화를 입는다. 평소 조순의 은혜를 입었던 시골 의원 ‘정영’(하성광)은 조씨 집안의 유일한 혈육인 ‘조씨고아’를 데려다 기른다. 20년 뒤, 조씨고아는 집안의 원수인 도안고한테 복수를 한다.
연극 <조씨고아, 복수의 씨앗>(각색·연출 고선웅)은 분명 한 편의 복수극이지만 복수 그 이상의 것을 이야기한다. 조씨고아가 도안고를 향해 칼을 빼어든다는 결말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 연극의 주인공은 분명 정영이다. 연극의 많은 분량도 정영이 갓태어난 조씨고아를 구해내는 과정을 담았다.
정영은 애초 조씨 집안의 멸족에 대해 마음이 아프지만, 조씨고아를 구하기 위해 자신의 목숨까지 걸 생각은 없었다. 그러나 그 핏덩어리를 살리기 위해 여러 사람이 잇달아 목숨을 내놓는 상황에 던져지면서 자신도 ‘약속’과 ‘의리’에 몸을 맡긴다. 이윽고는 자신의 친자식과 아내의 목숨까지 내놓아야 했다. 이런 사정 탓에 복수는 조씨고아의 것이 아니라 정영의 것이다. 복수 뒤의 허무함은 익히 알던 것이지만, 정영이 견뎌내야 하는 가혹한 운명은 뛰어난 연기와 강한 이야기의 힘으로 관객들을 사로잡는다. 소품을 최소화하고, 간간히 무대에 웃음이 요소까지 버무려 낸 연극적 연출도 빛난다.
연극이 끝나고 배우 하성광이 무대에 오른다. 그의 얼굴에는 정영의 슬픔이 고스란히 배어있다. 배우들이 모두 떠난 무대에 나비 한 마리가 남는다. 관객들은 한숨을 내쉬면서 자리에서 일어선다. 마지막 대사로 가슴을 적신 채…. “우환을 만들지도 당하지도 마시고, 부디 평화롭기만을. 금방이구나, 인생은. 부디 좋게만 사시다 가시기를.”
‘조씨고아’ 이야기는 사마천의 <사기>에 나온 것으로, 원나라 때 기군상이 연극적으로 재구성한 중국의 고전이다. 4일부터 무대에 오른 연극은 22일까지 서울 명동예술극장에서 이어진다. 1644-2003.
안창현 기자 blu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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