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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음악·공연·전시

칙칙한 조명·지루한 배치…기품 잃은 간송전

등록 2015-11-08 20:12

사진 노형석 기자
사진 노형석 기자
동대문DDP 전시 2년째
작품 교체 전시인가, 기획전인가?

43년간의 서울 성북동 간송미술관 시대를 마무리하고 지난해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에서 시작한 간송미술문화재단의 릴레이 기획전시인 간송문화전 1~5부가 갈수록 맥이 빠지고 진부해지는 기미가 뚜렷하다. 지난달 23일부터 시작된 5부 ‘화훼영모-자연을 품다’전은 간송미술관 전시의 기품을 잃고 지방 미술관의 상설전 교체 진열처럼 다가온다.

화훼영모는 한·중·일의 옛 선비와 화원들이 꽃과 풀, 짐승 등에 그린 이의 마음을 옮겨 담아 그린 장르다. 양화로 치면 정물화에 비견될 테지만, 사물과 인간의 기운을 드러내는 전통 회화의 원리를 역으로 그린 대상에 적용시키고 고도의 상징성까지 덧붙였다. 일상 여가에 동식물이 포착되는 순간을 그린 소품들이 많고 대작들도 구도가 비교적 단순하므로 눈길을 집중시켜 면밀히 봐야 눈맛이 생긴다. 산수와 달리 조명과 작품 배치에서 좀더 각별한 구성과 배려가 필요한 이유다.

지난달부터 5부 ‘화훼영모’ 전시
작품만큼 공간구성도 중요한데
별다른 고민 없이 대작만 앞세워

2년동안 45만 관객이 찾았지만
“기대에 못미쳐 적자 지속” 뒷말

간송이 소장한 시기별 화조, 영모화 90여점을 내온 전시는 이런 배려가 거의 보이지 않는다. 단골처럼 지적되어온 칙칙한 조명은 말할 것도 없고, 전시 구성도 1~4부의 지루한 백화점 진열장이 판박이로 되풀이되면서 털난 동물과 벌레, 풀꽃들이 화가의 필선과 색을 입어 뿜어내는 작품들의 인문적 향취를 누리기 어렵다. 전시장 말미는 아예 작품이 없어 더욱 황량하다. 그래도 눈 비비고 주시해야 하는 백미는 이 땅의 우울한 가을 분위기를 위로해주는 듯한 조선 후기 화인들의 작고 따뜻한 동물 그림들이다. 죽죽 잎가가 해어진 파초 아래에서 물끄러미 방아깨비를 심란하게 바라보는 ‘패초추묘’의 고양이 얼굴은 18세기 대가 심사정 자신의 얼굴일 것이다. 가문이 역모에 몰려 평생 눈치 보며 살아야 했던 그의 심사가 담겨 있는 듯하다. 심지어 살구나무 향을 맡으러 포르르 날아내려온 봄제비의 표정에도 뭔가 서늘한 기운이 서린 것이 바로 심사정의 소품이다.

반면 윤기 흐르는 고양이가 요상한 표정으로 역시 방아깨비를 노려보는 진경산수 거장 겸재 정선의 소품에는 넉넉한 여유와 아취가 서려 있다. 수박 파먹는 쥐들의 얄궂은 정경이나 한여름 패랭이꽃과 오이 아래 개구리가 넙적 엎드린 모양을 담은 겸재의 또다른 소품들은 그가 생태 다큐를 찍듯 자연적 일상의 관찰에도 깊은 내공이 있었음을 일러준다. 고슴도치가 몸을 굴려 등엣가시로 오이를 콕 찍어 서리를 하고 달아나는 홍진구의 소품도 볼수록 함함한 기운을 느끼게 하는 명품이다. 대작으로는 18세기 화단의 영수 표암 강세황의 ‘향원익청’이란 연꽃 그림이 백미다. 멀리 갈수록 향기가 맑아진다는 뜻의 제목처럼 연꽃 줄기 아래의 개구리, 연잎 위의 벌레가 사이좋게 공존하는 아련한 풍경 속에 연향이 흘러나오는 듯하다. 노란 고양이를 희롱하는 나비의 풍경을 담은 단원 김홍도의 ‘황묘농접’과 첫머리를 장식하는 고려 공민왕의 양 그림, 조선 초중기 화원들의 기품 넘치는 학 그림, 중국 물소를 빼닮은 김식의 소 그림 등도 눈여겨볼 만하다.

간송미술관에 서너 시간씩 줄을 섰던 수년전 인파들은 명품 못지않게 한양도성 옆 성북동 공간이 지닌 전통의 품격을 즐기러 온 이들이었다. 일본의 왕실 보물창고인 나라 쇼소인의 가을 기획전처럼 봄·가을 한국인들을 설레게 했던 간송미술관의 브랜드 가치를 재단 쪽은 고민 없이 명품만 앞세워 소진시키는 느낌이다. 2년간 1~4부 전시에서 45만 관객이 들었다지만, 미술계에선 기대치에 못 미치고 전시도 명품 돌리기에 그친다는 뒷말들이 많다. 재단의 목표인 전시관 신설과 재원 확충을 위해 간송컬렉션 가치에 걸맞은 신선한 기획을 고민하지 않으면, 대중의 관심은 앞으로 더욱 시들해질 것이란 지적들이다.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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