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노형석 기자
설치작가 임민욱 개인전
미술판의 ‘역사 공포증’ 정면 대적
관성 거부 그로테스크한 작품으로
미술판의 ‘역사 공포증’ 정면 대적
관성 거부 그로테스크한 작품으로
역사는 예술가에게 풍성한 창작의 텃밭이다. 분단과 전쟁, 민간인 학살 등의 굴곡이 잇따랐던 이 땅의 근현대사는 문학, 연극뿐 아니라 미술 장르에도 강렬한 시각적 영감을 제공한다. 그러나 현장의 미술인들은 건드릴 엄두를 내기는 어렵다고 대개 고개를 젓는다. 검열 차원을 넘어 분단, 학살 등을 섣불리 작업에 끌어들였다간 이념적인 진영논리에 어떤 식으로든 휩쓸려 들어갈 것이란 부담감이 크다는 것이다.
지난 연말부터 서울 태평로 삼성미술관 플라토에서 개인전을 열고 있는 설치작가 임민욱(49)씨의 작업들은 이런 미술판의 역사현실 공포증과 대적하는 결기를 뿜어낸다. 임씨는 프랑스 유학에서 돌아온 1990년대 중후반부터 도시 재개발과 주변부의 삶 등을 포착하며 동시대 한국의 사회상을 이야기하는 영상설치 작업들을 벌여왔다. 최근 수년 사이엔 민간인 학살과 분단, 이산, 통일 등으로 시야를 돌렸다. ‘만일의 약속’이란 제목이 붙은 전시 출품작들은 이런 흐름을 집약한 역작들이다. ‘분단과 통일’을 이야기할 때 소비하듯 떠올리는 판에 박은 이미지들을 벗어나 이 땅의 역사와 함께 가는 현대미술의 본령을 찾으려는 고민이 엿보인다.
전시 앞부분 ‘통일등고선’ 설치물은 지형도 모형이다. 백두산 천지와 한라산 백록담의 등고선 지형을 실물로 떠낸 것이다. 두 산의 모형을 마주보게 붙여놓고 두 산의 정상에 연질의 파라핀으로 빚은 남북한 대표 건축물들을 얼기설기 붙여 놓았다. 흐물흐물 녹아 흐르며 기울어진 남북의 건축물이 천지와 백록담 위에서 서로를 응시하는 듯한 이 그로테스크한 정경은 분단과 통일에 대한 관성적 생각들에 대한 권태와 거부감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반공, 적화, 해방 등의 경직된 개념어와 군사적 대치, 남북 당국자간 악수 같은 것 말고도 통일과 분단에 대해 한반도 사람들 각각의 머릿속에는 복잡한 기억과 상처, 인식들이 켜켜이 쌓여 있다는 것을 작가는 암시하고 있는 셈이다.
가장 안쪽 방 삼면에서는 1983년 이산가족찾기 생중계 방송을 확대편집한 영상작품을 틀어주고 있다. 당시 상봉을 신청한 사람들의 인상, 가족을 찾는 종이판 등을 확대하고 천천히 흘러가게 한 이 설치영상들은 전시 제목과 같은 이름이 붙어 있다. ‘빨리빨리’ ‘강렬하게’의 구호를 좇는 미디어에 의해 슬픔, 환희의 획일적 이미지로 편집된 당시 수많은 이산가족들의 속내를 삼십여년 뒤 찬찬히 헤아려보자는 의도를 담았다. 예술의 자유로운 시선으로 종횡무진 우리 근대사의 심연을 파헤쳐보려는 작가의 집념이 와닿는다. 3월13일까지. 1577-7595.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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