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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음악·공연·전시

리뷰, 노다 히데키 ‘빨간 도깨비’

등록 2005-10-19 17:35수정 2005-10-20 14:22

인간의 이기심을 폭로하고 치유하다
3주에 걸친 ‘2005 서울국제공연예술제’(9월23일~10월16일)가 막을 내렸다. 선선한 가을 바람과 함께 세계 각지에서 온 연극 작품들은 극장이라는 도가니 속에서 우리를 흥분시키고 행복하게 해주었다. 연극은 끝났지만 그 충만함은 마약처럼 우리 몸에 남을 것이다. 다른 연극이 시작할 때 우리를 극장으로 이끄는 힘은 중독과도 같은 그 기억이다.

개막작인 스페인 작품 <맥도날드의 광대, 로널드 이야기>는 미국 중심의 신제국주의 체제 속에서 이제는 세계 어디에서도 독립된 삶은 없다는 것을 역설했다. 그러나 절망은 금물이라고, 불가능에 도전하는 열정을 갖자고, 연출가 로드리고 가르시아는 유쾌하게 말한다.

튀니지의 <주눈의 눈>은 아랍 사회의 다중적 억압을, 정제되지 않은 폭력과 거친 언어로 신선하게 표현했다. 정신 분열 증세를 겪는 남자 주눈이 마침내 자신의 정체성을 찾으면서, 자신이 나무였다면 “하늘을 찌를 듯한 종려나무”였을 것이라 외칠 때 관객들은 벌떡 일어나 열정적인 박수를 보냈다.

연극적 충만으로 가득했던 공연 중의 하나가 바로 노다 히데키 작·연출의 <빨간 도깨비>였다. 빨간 도깨비 역의 노다와 수없이 역할을 바꾸는 배우 3명(최광일, 오용, 최수현)이 문예소극장 무대 위를 누빌 때, 무대를 네 면으로 둘러싼 객석은 쥐죽은 듯 무대를 응시했다. 객석에 둘러싸여 마치 배를 뒤집은 것처럼 돋워진 무채색의 네모난 무대는 집이 되었다, 동굴이 되었다, 바다가 되었다 하며 관객의 상상력 위에서 연극적 유희의 장이 된다.

바닷가 마을에 해안에서 밀려온 ‘미지의 인물’, 생긴 것이 보통 사람과는 전혀 다르고 언어도 다른 그는 마을 사람들에게 ‘빨간 도깨비’로 낙인 찍히고 처형당할 위기에 처한다. 유일하게 그를 이해하려 노력하는 여자는 마을 사람들에게 ‘그 여자’라 불리는 외지 사람이다. 그의 좀 모자란 오빠 토비와 마을의 난봉꾼 미즈카네, 연극은 이들을 둘러싼 이야기다.

관객을 210명 가량으로 제한했기에 밀교적 뜨거움까지 있었던 이 공연은 의미로 가득 차 있었다. 그것은 자아와 타자, 이기심과 사랑, 대칭과 비대칭, 언어와 커뮤니케이션 같이 우리가 평소 잊고 살지만 생각해야 할 문제들과 관련돼 있다. 그러나 이 연극의 매력은 이야기 전체를 이끄는 거대담론보다는 그것을 넘어서며 순간을 빛나게 하는 시적 언어에서 나온다. 그건 마치 하이쿠의 세계와 같다. 배우들 입에서 툭툭 불거져 나오는 대사들은 ‘이곳’ 현실만을 지칭하지 않고 ‘저편’의 형이상학적 진실을 담아내었던 것이다.

이번 공연예술제에는 유난히도 많은 병리현상들이 등장했다. 고문과 학대, 정신분열, 자폐, 코마, 자살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연극 <빨간 도깨비>는 우리 자신의 이기심과 그것으로 인한 절망을 숨김없이 드러냈다. 연극은 사회의 질병을 감지하고 그 긴장을 무대 위에 올려놓는다. 무대는 우리 몸에 숨겨진 상처가 폭로되고 치유되는 공간인 까닭이다.

노이정/연극평론가 voiver@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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