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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음악·공연·전시

터전없는 삶 비웃듯 ‘괴기스러운 무대’

등록 2016-02-03 20:10수정 2016-02-03 21:07

연극 ‘떠도는 땅’ 13일부터 공연
아버지 땅을 팔아 빚을 갚으려
20년만에 고향으로 돌아왔지만
장례 마지막날 ‘궁지’ 몰리는데…
“우리 아버지 대신 뭔가를 태우나 보네. 아버지만큼 무겁고 아버지만큼 차갑고 아버지만큼 젖었고 아버지만 한데 태우면 연기가 아주 많이 나는 거….”(미스타 노) “내장이 사라지면 척추가 보이기 시작해요. 척추가 불길 속에서 하얗게 빛나고, 갓 지은 쌀밥처럼 하얗게, 이윽고 뼈가 떨어져 나가요. 시신을 태우는 일은 부패의 전 과정을 응축시킨 것 같아요. 시간을 불태우는 거죠.”(미스터 리)

그로테스크하다. 동이향 작·연출의 연극 <떠도는 땅>의 마지막 부분 대사다. 대본은 시적이고 상징적인 언어로 빼곡하다. 작품 내내 장례식장, 무덤, 가면, 닭 목을 치는 칼, 부여 궁남지, 주검 밀매 소문, 불륜과 섹스 등 괴기스럽고 불편한 이미지들이 출몰한다. <떠도는 땅>의 기획의도는 땅에 소속되지 못하고 떠도는 동시대인의 삶을 그리는 것이다. 거칠게 몽뚱거리자면, 실체 없는 삶을 비웃듯 허공에 깔깔거리는 요기(妖氣)와 뭔가를 배출하고 싶은 요의(尿意)라고 할 수 있다.

대본의 단어들은 땡글땡글하게 뭉쳤다. 대단히 촘촘한 언어의 밀도다. 궁금했다. 그렇게 뭉친 글이 어떻게 말로 변하고, 대본에서 뛰쳐나와 무대 위를 뚜벅뚜벅 걸어다닐까? 문자 속의 말들이 푸른 방귀를 퉁! 뀌면서 어떻게 관객의 가슴에 ‘한 줌 소금’을 남길 수 있을까? 자신만의 언어로 중무장한 작가는 관객을 어떻게 설득할까? 그러므로 동이향의 작업은 험난하다. 최근 서울 대학로예술극장 연습실에서 동이향의 작업을 미리 만났다.

“통상적인 스토리텔링, 이미지 구성과는 좀 다르게 쓰는 편이다. (관객이 어려워 하더라도) 개의치 않고 끝까지 밀어붙이는 느낌으로 썼다. 웰메이드 연극을 시도하면 작품이 되레 더 어려워진다. 그러면 뒤늦게 그것은 나의 언어가 아니었구나 한다.”

이해를 도우려, <떠도는 땅>의 줄거리를 한번 훑어보자. ‘미스타 노’는 돌아가신 아버지의 땅을 팔아 빚을 갚으려 20년 만에 고향에 돌아왔다. 장례의 마지막 밤, 고향 마을에선 온갖 불길한 사건이 벌어져 미스타 노를 궁지로 몰아간다. 야시장에는 연쇄살인범이 나다닌다는 소문이 파다한데, 중학생 딸은 자정이 넘은 시간 친구들을 만나러 나가버렸다. 동네 노인들은 기르던 닭들이 굶어 죽자 닭의 목을 치기 시작했고, 20년 만에 다시 보게 된 첫사랑은 생활고에 시달리는 초라한 중년이 되어 나타났다. 그런 가운데 귀신을 본다는 아내의 불륜 상대는 미스타 노를 아버지의 땅 앞에 불러 세운다.

무수한 이미지가 출몰하는 만큼 개별 이미지에 집착하기보다는 전체적 느낌을 중심으로 감상했으면 좋겠다는 게 동이향의 바람이다. 두 시간 이상 진행한 연습에서 동이향은 자주 웃었지만 “소리 좀 낮춰주세요”라며 예민하게 스태프에게 주문하기도 했다. 의욕과 부담은 비례하는 법이니까.

<떠도는 땅>은 2014년 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주관하는 창작산실 대본공모 수상작이며, 2015년에는 예술위 제작지원사업에 선정됐다. 동이향 연출을 중심으로 4명의 배우가 모인 ‘극단 두’의 창단공연이기도 하다. 이달 13~28일 서울 대학로예술극장 대극장.

손준현 기자 dus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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