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벨의 ‘볼레로’가 흘렀다.
두 개의 주제와 볼레로 리듬이 169번 되풀이되는 곡이다. 지난 15일 서울 남산 국립극장 해오름극장, 24명의 춤꾼이 볼레로의 반복 리듬에 따라 움직임-멈춤-움직임을 계속했다. 첫번째 움직임은 정통적 무용 문법에 따라 느리고 과장된 몸짓으로 전개된다. 잠시 ‘빈 테마’라고 불리는 멈춤 자세가 이어진다. 두번째 움직임은 경쾌하고 익살스러우며 파격적이다. 어찌 보면 막춤 같기도 하다.
프랑스 샤요국립극장 상임안무가 조세 몽탈보(62)의 지휘 아래 국립무용단원들이 연습 중인 이 작품은 <시간의 나이>다. 국립극장과 샤요국립극장이 공동제작한 신작으로, 2015~2016 한-불 상호교류의 해 ‘한국 내 프랑스의 해’ 개막작이다. 작품 제목은 과거를 축적해 새로운 것을 완성한다는 의미다. “상상하라, 현실이 될 때까지”를 내세운 이 작품은 한국-프랑스, 과거-현재, 상상-현실 등 다원·다층적 주제를 화학적으로 결합했다.
이날 연습을 끝낸 몽탈보는 ‘볼레로’ 장면은 앞으로 안무를 추가할 생각이라고 했다. “느린 움직임에서 빠른 움직임으로 넘어가는 부분은 인간의 순간적인 욕망과 강렬한 고동(pulse)을 표현했다. 중간의 멈춤 부분엔 다른 안무를 추가할 생각이다. 아직 정해지지 않았는데, 예를 들면 여자 한 명과 남자 한 명이 춤추며 하나의 스토리텔링을 할 예정이다.”
모두 3장 가운데 1장에서는 바로크 음악을 현대적으로 편곡한 곡에 맞춰 춤을 춘다. 몽탈보는 “포스트모더니즘을 표현하는 것인데, 이는 전통에 기반을 둔 현대식 표현이라는 이 공연의 콘셉트와도 잘 맞는다”고 했다. 2장에서는 세계 인류를 표현하는 영상에 맞춰 여러 나라의 음악을 섞어 쓰고, 3장은 볼레로에 맞춰 욕망을 표현한다.
몽탈보는 안무의 주안점이 장별로 다르다고 설명했다. “1장은 봄·시작 등을 의미하며 아이처럼 뛰어노는 놀이를 표현한다. 2장에서는 더 성숙하고 진지한 인류의 비극이나 내면적인 부분들을 담아낸다. 또 3장에서는 볼레로 음악과 함께 인간의 욕망을 표현하고자 했다.”
우리 전통춤에 익숙한 국립무용단원들은 이런 파격적인 안무에 당혹스럽지 않았을까? 이들은 현대무용 춤꾼들과 달리 한국춤에 기반을 둬 호흡을 맺고 끊는 절도있는 춤사위를 보여왔기 때문이다. 게다가 ‘개다리춤’을 연상시키는 동작까지 나오니까. 하지만 국립무용단 춤꾼들의 반응은 매우 호의적이었다.
1996년 입단한 장현수는 ‘몽탈보의 한국적 호흡’에 놀랐다. “매우 색다른 작업이다. 사실 한국 안무자들은 요즘 대부분 현대적인 움직임을 찾고자 하는데 몽탈보는 현대무용 안무자임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더욱 한국적 호흡을 끄집어내려고 노력해서 놀라웠다. 볼레로 음악에도 한국적 호흡을 요구했다. 잘 안 맞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해보니 이미지와 느낌, 감성이 잘 맞아서 추면서도 희열을 느낄 수 있었다.”
1997년 입단한 김미애는 ‘춤꾼이 가져야 할 창작자 마인드’에 주목했다. “무용수로서 늘 안무된 춤을 받은 그대로 연습해서 무대에 올리는 작업을 대부분 해왔는데, 이번 공연에서는 무용수도 함께 창작자의 마인드로 더 적극적으로 임해야 했다는 부분이 가장 큰 차별점이었다. 이렇게 작업하는 방식은 무용수한테 스트레스가 되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이 작품에 대해 그 어느 때보다 더 깊이 생각할 수 있게 되어 흥미로웠다.”
이날 연습에선 몽탈보와 조안무, 춤꾼들의 대화가 시시각각으로 이뤄졌다. 춤꾼들은 논의결과를 곧바로 춤에 반영했다. 이달 23~27일 서울 국립극장 해오름극장. (02)2280-4114~6.
손준현 기자
dust@hani.co.kr, 사진 국립극장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