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게티이미지뱅크
그 나물에 그 밥만 있는 ‘오페라 편식’
유튜브·앨범 덕 관객 수준 높은데
베르디·푸치니 등 20편 ‘돌려막기’
‘50여편 레퍼토리’ 유럽과 대조적
성악가는 부르기 힘든 곡 피하고
관객도 검증된 유명작품 선택 경향
시스템 개선 등 오페라단 지원 필요
유튜브·앨범 덕 관객 수준 높은데
베르디·푸치니 등 20편 ‘돌려막기’
‘50여편 레퍼토리’ 유럽과 대조적
성악가는 부르기 힘든 곡 피하고
관객도 검증된 유명작품 선택 경향
시스템 개선 등 오페라단 지원 필요
1948년 한국 첫 오페라가 시공관(지금의 서울 명동 국립극장) 무대에 올랐다. 소프라노 김자경(1917~99)이 비올레타를 맡은 베르디의 <라 트라비아타>였다. 김자경은 그 이후엔 미국 메트로폴리탄 오페라하우스 가수들과 글루크의 <오르페오와 에우리디체> 등을 공연했다. 1968년엔 우리나라 최초의 본격적인 민간 오페라단인 김자경오페라단을 창단했다.
김자경이 뿌린 씨는 홍혜경, 조수미, 신영옥으로 꽃을 피웠다. 베이스바리톤 연광철과 사무엘 윤도 유럽 무대에서 열매를 맺었다. 오페라는 이미 우리 곁에 성큼 다가와 있다. 유튜브로 검색하면 세계 유수 극장의 오페라를 손쉽게 접할 수 있고, 대형복합상영관을 가면 초고화질과 실감나는 음향으로 바그너의 <니벨룽의 반지>까지 만날 수 있다. <유럽음악축제 순례기> 같은 안내서들이 인기를 끌면서 독일 바이로이트나 오스트리아 브레겐츠 페스티벌을 직접 찾아가는 이들도 늘고 있다. 눈높이도 부쩍 높아진 것이다.
이처럼 한국 오페라는 지난 70년 가까운 기간 동안 급성장했으나, 국내 무대는 베르디, 푸치니, 도니체티 등 늘 보던 작품이 대부분이다. 겨우 20여편의 작품으로 돌려막기를 하고 있다. 물론 최근 국내 초연작이 늘었다고 하지만, 도대체 왜 그럴까?
■ 20여편만 돌고 도는 국내 무대 400여년 오페라 역사에서 지난 50년간 유럽의 메이저 극장에 반복적으로 오르는 작품들이 있다. 이를 ‘표준 레퍼토리’라는 이름으로 정리해보면 적게는 50편 안팎, 조금 넓히면 100편 정도다.(<표> 참고) 이해를 돕기 위해 편의상 ‘교양필수’와 ‘교양선택’으로 분류한 33편 가운데는 국내에서 거의 공연되지 않는 작품이 많다. 세계 기준에 견줘보면, 한마디로 ‘오페라 편식’이다.
우리나라에서 올라가는 작품의 ‘베스트 5’를 꼽자면, 대략 베르디의 <리골레토>와 <라 트라비아타>, 푸치니의 <토스카>와 <라보엠>, 모차르트의 <피가로의 결혼> 정도다. 그밖에 <나비부인> 등을 추가하더라도 “한국인이 좋아한다”는 20여편에서 계속 맴돌고 있는 셈이다. 1970~80년대 이탈리아 유학파들이 자신들이 잘 아는 이탈리아 작품을 국내 무대에 주로 올려왔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이에 따라 바그너의 <탄호이저>와 <로엔그린>,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살로메>와 <엘렉트라>, 브리튼의 <피터 그라임스>, 거슈인의 <포기와 베스>, 차이콥스키의 <예브게니 오네긴>과 <스페이드의 여왕> 등은 외국에선 표준 레퍼토리에 포함되지만 한국에서는 거의 공연하지 않는다. 일부는 한국 초연이 이뤄졌지만, 베르디와 푸치니의 다른 인기 작품들에 견줘 항상 후순위로 밀렸다.
더구나 이탈리아 작품 속에서도 ‘편식’이 존재한다. 성악가인 정은숙 성남문화재단 대표(전 국립오페라단장)는 “벨리니의 <몽유병 여인>은 국내 초연도 하지 않았고, <청교도>와 <노르마>도 예전에 한 번 했을 정도”라고 설명했다.
서정원 오페라칼럼니스트는 표준 레퍼토리가 차근차근 우리 무대에 하나씩 올라가기를 바란다. “동영상 사이트에서 다양한 오페라를 접할 수 있고, 유럽 축제에도 참관하면서 눈높이도 높아졌다. 박종호씨가 쓴 <불멸의 오페라> 3권에 소개된 오페라는 150편 정도다. 글로벌 스탠더드와 우리 관객의 눈높이를 고려하면 장기적으로 50편, 100편 등으로 점차 레퍼토리를 늘려가야 한다.”
문제는 국내 무대에 오르지 않은 작품이 무엇인지 변변한 통계조차 없다는 점이다. 이에 대중의 요구 수준은 대체 어느 정도인지 파악하기조차 힘들다. 그저 “그런 작품은 어려워 관객이 들지 않을 거야”라는 주먹구구식 예측만 있을 뿐이다.
■ 몰라서, 두려워서, 관객이 외면해서… 그러면 새로운 레퍼토리가 잘 올라가지 않는 이유는 뭘까? 전문가들의 진단은 다양하다.
성악가이면서 제작에 참여하는 박평준 티엘아이(TLI)아트센터 예술감독은 “일단 익숙한 작품을 선호한다. 대학이나 유학 때 베르디, 푸치니, 도니체티와 같은 이탈리아 작곡가나 모차르트 정도를 배운다. 대중음악 쪽과 마찬가지로 성악가들도 부르기 힘든 곡은 피한다”고 했다.
작곡가인 이건용 서울시오페라단장은 관객의 기호를 밥에 비유해 설명했다. “늘 먹는 집밥처럼 영양을 보충해야 하는 오페라도 있고, 외식처럼 입맛을 넓혀가는 오페라도 있다. 한 해 열 번 오페라 공연장을 찾는 사람은 네 번 정도 실패하더라도 새로운 걸 볼 생각이 있지만, 한 번 가는 사람은 선택한 티켓이 실패하지 않았으면 한다.” 이들의 얘기를 요약하면, “몰라서, 두려워서, 관객이 안 찾을 것 같아서” 새로운 레퍼토리를 하지 않는다는 얘기다.
더 근본적으로는 한국 오페라의 제작 시스템의 미비를 지적하는 목소리도 있다. 박제성 음악칼럼니스트는 이렇게 정리했다. “우선 전용 오페라극장, 전속 오케스트라, 예술감독, 프로페셔널한 극장장, 의상, 조명, 반주자 등 시스템이 갖춰져 있지 않다. 국립오페라단에 대한 당국의 예산 지원도 부족하다. 그러니 10여곳 민간 오페라단에선 새 레퍼토리는 아예 엄두조차 내지 못한다. 기업에서 예술지원을 했을 때 감세 혜택을 늘리는 등 제도적 지원도 필요하다.”
그는 멀리 내다보는 기획도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오페라 한 작품을 올리려면 유럽 기준으로는 보통 2~3년이 걸린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5~6개월 만에 뚝딱뚝딱 만들어내니까 발전을 할 수 있는 토대가 부족하다.”
오페라 팬들도 처음엔 표준 레퍼토리의 교양필수부터 차근차근 익히고 즐겨야 하겠지만, 그 단계를 넘었다면 목소리를 내야 한다. “국내에서도 더 다양한 작품을 보고 싶다”고.
손준현 기자 dust@hani.co.kr
바그너 '니벨룽의 반지' 4부작의 '발퀴레'. 사진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제공
2013년 국내 초연한 바그너 '파르지팔'. 사진 국립오페라단 제공
2009년 독일 '파르지팔' 무대에 선 연광철. 사진 바이로이트 페스티벌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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