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단 ‘76단’이 창립 40돌을 맞아 올리는 기념공연 <리어의 역>을 쓰고 연출한 기국서 연출가가 21일 오후 서울 종로구 혜화동 선돌극장에서 <한겨레>와 인터뷰하고 있다. 김정효 기자 hyopd@hani.co.kr
인터뷰 l 연출가 기국서
“1980년대에는 기국서의 ‘햄릿 시리즈’ 1~5가 있었다. 기국서의 햄릿은 군복 입고 나와 기관총 쏘고 수류탄을 던지며 군사정권에 맞서는 지식인을 다룬 사회극이었다.”(이윤택 연출, 2014년 <한겨레>인터뷰) 기국서(64) 연출의 작품목록에서 햄릿이 차지하는 비중은 절대적이다. 2012년 무대에 올린 <햄릿6: 삼양동 국화 옆에서>까지 모두 6편의 햄릿 연작은 기국서가 당대 사회와 맞선 처절한 투쟁의 기록이다.
1980년대부터 연작한 햄릿 6편
군사쿠데타 등 사회현실 풍자
‘관객모독’ 등 여러 문제작 연출 창단 멤버격인 극단 ‘76단’ 40돌
신작 ‘리어의 역’ 기념공연 올려
“치매 걸린 평생배우의 심정 다뤄”
“1981년 <햄릿1>을 올리기 전에 10.26과 5.18이 있었다. 그걸 표현하고픈데 당시 대본은 당국이 사전검열을 했으니까, 글로는 쓸 수 없어 이미지로 표현했다. 왕에겐 검은 베레모, 검정 선글라스를 씌우고 햄릿에겐 청바지를 입혔다. 공수부대 부하들에겐 기관총을 들고 무대에 올라가도록 했다. 관객들은 혼비백산하면서도 속이 시원하다고 했다. 다행히 정보기관에서 보지 않아 뒤탈은 안 났다. 기회가 된다면 <햄릿1>을 다시 한번 무대에 올려보고 싶다.”
기국서가 상임연출가로 있는 극단 ‘76단’이 창립 40돌을 맞았다. 지난 40년간 기국서는 <햄릿>연작과 함께 <관객 모독>(1979), <미아리 텍사스>(1990), <미친 리어>(1995), <개>(1996) 등 시대를 성찰하고 인간을 탐구하는 수많은 문제작을 남겼다. 연극적 실험과 극적 언어의 시도는 수많은 연극인에게 교과서와도 같이 각인됐다. 기국서 연출이 76단 40주년 기념공연 <리어의 역>을 올리고 있다. 지난 21일 서울 대학로에서 그를 만났다.
“연극을 올릴 때마다 나는 고전을 토대로 올리지만, 배우들에겐 과연 어떤 느낌을 줄지 궁금했다. 평생 배우만 한 사람이 치매에 걸렸다면, 그 정신은 어떤 걸까, 라는 상상에서 이 작품을 쓰기 시작했다. 한마디로 늙은 연극배우의 이야기이다. 주역을 맡은 홍원기의 연기를 보는 맛이 쏠쏠할 것이다. 홍원기는 내 대본이 관념적이더라도 단박에 일상어로 소화시키는 배우다.”
<리어의 역>에선 30년 동안 리어왕 역을 한 배우가 치매에 걸려 은퇴한다. 국가는 그의 이름으로 극장을 지었고 그는 그 극장 무대 바로 밑의 공간에서 유폐된 생활을 한다. 그는 인터뷰를 위해 찾아온 기자에게 자신의 배우생활에 관하여, 인생에 관하여, 예술에 관하여 말하기 시작한다.
기국서 연출에게 햄릿과 리어왕은 어떤 의미일까. “햄릿을 여섯 번 했고, 리어왕을 두 번 했다. 햄릿은 젊은 얘기고 리어는 늙은 얘기다. 특히 리어 앞에 연출자의 무덤이 가장 많이 쌓인다고 한다. 많은 이가 도전하지만 너무 방대하니까, 다 못하고 죽는 거다. 이번 <리어의 역>은 치매와의 싸움, 시간과의 싸움을 그린다.”
기국서의 연출인생 40년은 때론 폭주하는 기관차였고, 때론 망망대해의 난파선이었다. 1976년 서울 신촌역 초입 시장통에서 전설적인 극단 ‘76단’이 탄생할 때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저는 창간 1년 뒤에 76단에 합류했다. 1978~80년 신촌역 초입의 100석도 되지 않는 극장에 영화감독, 연극인들이 모여 밤새 소주, 맥주, 막걸리를 마시며 논쟁을 벌였다. 나는 원래 민주주의자였는데, 탁상공론 같은 휘황한 얘기가 나오면 확 뒤집어엎었다. 그때부터 그런 스타일이 생긴 거다. 당시 신문 기사는 ‘철없는 젊은이라도 불온함을 사랑한다’며 ‘앙팡 테리블’이라고 우리를 소개했다. 김수영, 백남준 등을 입에 올리고, 연극뿐 아니라 미술 실험적인 사조 얘기까지 넘쳤다.”
‘검열의 시대’를 살아온 연출자로서 그는 최근 정부기관의 ‘검열 파문’에 일침을 가했다. “참으로 사람들이 생각이 모자라는구나, 여유가 없다는 생각이 든다. 이 나라가 젊은이에겐 헬조선이라는데, 검열사태까지 벌어지니 수치스럽다. 차라리 노골적으로 무식하지, 지금처럼 바보 같은 모습을 보이니까 되레 우스워지잖아.”
기국서는 연출동인 혜화동1번지의 1기 동인이다. 그는 까마득한 후배 연출의 작품에 애정을 보였다. “가끔 보지만 정말 새롭고 열심히 노력한다. 우리 세대는 사회성에 상상력을 발휘했는데, 요즘 친구들은 개인의 상상력을 발휘하고 있다. 그것도 좋은 현상이라고 본다. 혜화동1번지 6기 동인 백석현의 작품에서 주인공인 동물들의 생각을 몸짓으로 표현해내는 게 인상적이었다. 그 정열이 너무 부러웠다. 또 7개월이나 연습해 올린 작품을 며칠밖에 공연 못 하니까 무척 안타까웠다.”
기국서의 연출인생 40년이 담긴 <리어의 역>은 다음달 8일까지 서울 대학로 선돌극장에서 공연하며, 자리를 옮겨 6월 1~5일 대학로 게릴라극장에서 재공연한다. 76단의 40주년 기념공연은 5월 박근형 연출의 <죽이 되든 밥이 되든>과 6월 김낙형 연출의 <붉은 매미>로 이어진다.
손준현 기자 dust@hani.co.kr
군사쿠데타 등 사회현실 풍자
‘관객모독’ 등 여러 문제작 연출 창단 멤버격인 극단 ‘76단’ 40돌
신작 ‘리어의 역’ 기념공연 올려
“치매 걸린 평생배우의 심정 다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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