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무용단의 <시간의 나이> 프랑스 샤요극장 초연에서 춤꾼들이 북 위에 걸터앉아 원초적이고 역동적인 춤을 선보이고 있다. 사진 국립무용단 제공
라벨의 ‘볼레로’ 선율이 흘렀다. 춤꾼은 와인색 원피스 치마 끝을 살짝 들어올렸다. 허벅지가 보일락말락. 정중동(靜中動)의 발디딤새와 손매무새. 발끝을 차고 오른 춤은 굴곡진 몸을 타고 머리끝으로 솟구쳤다. 춤은 다시 정수리에서 어깨를 굽이쳐 손끝에서 허공에 정점을 찍었다. 순간, 한국 춤꾼의 눈은 프랑스 관객의 눈과 딱 마주쳤다. 전통과 현대, 한국과 프랑스의 눈맞춤. 장현수 국립무용단 수석무용수가 춘 춤의 뿌리는 살풀이와 태평무. 전통춤에서 버선코가 겨우 보일락말락 한 긴 치마는 이날 무대에선 무릎 언저리에 찰랑찰랑한 원피스로 바뀌었고, 수건을 든 살풀이춤은 수건 없는 컨템퍼러리 춤으로 되살아났다.
지난 16일 밤(현지시각) 국립무용단의 한-불 교류의 해 기념작 <시간의 나이>가 프랑스 파리 국립 샤요극장 무대에 처음으로 올랐다. 1939년 조선 제일의 춤꾼 최승희(1911~1969)가 춤사위를 펼쳤던 바로 그곳. 이날 모두 1200석 중 판매석 1015석이 매진됐다. 극장 밖은 노동법 개정에 반대하는 공공기관의 파업과 ‘유로 2016’의 축구 열기로 어수선했다. 이 북새통을 뚫고 관객이 이곳을 찾은 것은 ‘믿고 보는 안무가’ 조제 몽탈보 때문이다.
춤꾼과 관객의 눈맞춤 70분. 이어 기립박수를 포함한 휘파람과 환호 4분. 치마를 훌쩍 올려 각선미를 뽐내는 ‘캉캉춤의 도시’ 파리는 ‘치마 끝을 살짝 든’ 한국춤의 은근한 미학에 매혹됐다.
국립무용단의 <시간의 나이> 프랑스 샤요극장 초연에서 춤꾼들이 한국춤에 바탕을 둔 컨템퍼리리 무용을 선보이고 있다. 사진 국립무용단 제공
김미애 수석무용수의 2장 솔로 춤도 빼어났다. 빠르게 움직이다 갑자기 정지하는가 하면, ‘팔은 빠른데 발은 느린’ 동작은 객석의 눈길을 단박에 낚아챘다. 그뿐인가. 부채춤 장면은 빨간색과 흰색이 팽이처럼 돌면서 화려한 색채감과 속도감을 뽐냈다. <시간의 나이>는 모두 3장으로, 1장은 한국 전통춤, 2장은 휴머니즘, 3장은 한국전통과 현대의 만남을 그렸다.
파리 관객은 북춤을 이번 공연의 백미로 꼽았다. 북 위에 도발적으로 걸터앉은 여성 춤꾼들이 펼치는 원초적이고 역동적인 장면이다. 두드림은 춤꾼의 심장을 고동치게 하고, 객석의 심장을 격동하며 1200석 극장을 하나의 숨가쁜 맥박으로 몰아갔다. 2장에서 영상작업을 맡았던 얀 아르튀스 베르트랑은 17일 공연을 본 뒤 “여성 춤꾼들이 북 위에 앉아 추는 춤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클래식한 전통이 아니라 현대식으로 새롭게 해석한 전통이다”라고 했다. 그는 <하늘에서 본 지구>로 유명한 사진작가다.
국립무용단의 <시간의 나이> 프랑스 샤요극장 초연에서 1200석을 꽉 채운 관객 앞에서 춤꾼들이 부채춤을 선보이고 있다. 사진 국립무용단 제공
“눈을 뗄 수 없었다”는 반응도 나왔다. 연이틀 공연장을 찾은 70대 여성 안드레의 찬사다. “어제(16일) 공연을 보고 너무 좋아 오늘(17일) 다시 남편과 보러왔다. 한국춤은 처음 보지만 섬세한 표현과 움직임이 정말 아름다웠다.” ‘포미니츠’를 좋아한다는 14살의 케이팝 팬과 30대 남성은 “새롭고 이국적인 춤”이라고 했다. 로비에서는 삼삼오오 공연을 두고 대화하는 모습도 눈에 띄었다.
장현수 국립무용단 수석무용수가 <시간의 나이> 3장에서 라벨의 볼레로에 맞춰 한국춤을 추고 있다. 사진 국립무용단 제공
이번 파리 공연은 지난 3월 서울 국립극장 초연 때와 확연히 달랐다.
우선 춤과 영상이 큰폭 수정됐다. 1장에서 ‘한국 홍보영상물’ 같던 장면을 걷어내고 무채색 계통의 은은한 영상을 배경으로 전통춤을 더 강조했다. 3장 볼레로에서도 ‘플라멩코같이 빠른 동작을 없애고 한국적인 느림의 미학을 더 추가했다. 공연 뒤 장인주 무용평론가는 “한국전통춤과 컨템퍼러리가 조화를 잘 이룬 것 같다. 프랑스 관객에겐 장현수의 볼레로 장면이 가장 큰 반향을 불렀고, 김미애의 솔로 춤은 그 자체로 정상급이었다”고 평가했다.
그 다음으로 극장이 달랐다. 국립극장이 ‘앞부분만 보이는 평면무대’였다면, 샤요극장은 ‘전체가 보이는 입체무대’. 15도 이상의 객석 경사도는 폭넓은 시야를 확보하고, 춤꾼의 숨결까지 느끼도록 무대와 거리를 좁혔다. 이 때문에 1200석 대극장이 500~600석 중극장 같은 몰입도를 빚어냈다. 춤꾼 키높이의 양쪽 측면 조명도 인상적이었다. 측면 조명은 위에서 쏘는 조명과 어울려 춤꾼의 동작을 더 섬세하고 입체적으로 만들었다. 이번 샤요 공연은 ‘극장도 하나의 춤꾼’이라는 점을 새삼 각인시켰다.
한국 전통과 프랑스 컨템퍼러리의 만남을 몽탈보는 “전통에 새로운 힘을 부여한다”라고 표현했다. 국립무용단은 18일 파리 시민을 대상으로 ‘한국춤 배우기’ 행사도 했다. <시간의 나이> 파리 공연은 24일까지 7번에 걸쳐 진행된다.
파리/손준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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