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출신에다 외국생활을 한번도 해보지 않았어요. 혼자 살아보는 게 처음이라 조금은 걱정도 돼요. 하지만 줄리 켄트가 이끄는 발레단에 합류하니까, 새로운 변화 기대에 가슴 설렙니다.”
외국에서 공부하지 않은 ‘순수 국내파’ 발레리나 이은원(25) 국립발레단 수석무용수가 미국의 명문 워싱턴발레단에 입단한다. 1980년대 문훈숙 유니버설발레단장, 1990년대부터 조주현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가 주역 무용수로 활동한 곳이다. 창단 40돌을 맞아 지난해 아메리칸발레시어터(ABT)를 은퇴한 세계적인 무용수 줄리 켄트(47)를 예술감독으로 영입해 새로운 변화를 모색하고 있다. 이은원은 9월 시작되는 2016∼2017 시즌부터 솔리스트와 주역으로 활동할 예정이다.
국내 마지막 무대인 <말괄량이 길들이기>(23~26일 서울 예술의전당) 공연을 앞두고 막바지 연습에 한창인 그를 21일 국립발레단에서 만났다.
“국립발레단은 집 같은 존재고, 단원들은 가족 같은 존재예요. 갓난애 같던 저를 이만큼 키워줬잖아요. 지금은 떠나지만, 사람으로서 예술가로서 더 성장해서 돌아오고 싶어요. 늘 그리울 거에요.”
줄리 켄트 워싱턴발레단 예술감독이 전자우편을 최종적으로 보낸 건 이달 초. “많은 사람이 당신이 너무 잘한다고 얘기를 해서 기대가 된다. 아직도 다양한 세상을 경험하고 싶은 생각이 있느냐? 우리와 같이 일하면 기쁠 것 같다.” 켄트는 이미 이은원에 대해 많은 정보를 갖고 있었다.
“켄트는 한국계 치료사로부터 제 얘기를 들었고, 켄트가 궁금해 하니까 김혜식 한예종 초대 무용원장이 조언을 해주셨고, 여러분의 도움을 받아 제가 입단하게 됐어요.” 강수진 국립발레단 예술감독도 퇴단을 허락하고 해외에서 다양한 경험을 쌓으라고 격려했다.
일곱 살 때 발레를 시작한 이은원은 예원학교를 나와 고교 과정을 건너뛰고 한예종을 졸업하기까지 한국에서만 공부했다. 김선희 한예종 무용원장으로부터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대학까지 7~8년을 배웠고, 김혜식 전 무용원장, 러시아 출신 선생들로부터도 가르침을 받았지만 국내를 떠나본 적이 없다. 그의 형부는 국립발레단 출신 유명 사진작가 박귀섭(BAKI)이다.
19살이던 2010년 인턴단원으로 국립발레단에 들어와 <호두까기 인형>의 주역을 맡았다. 정단원이 된 직후 김주원, 김지영 등 쟁쟁한 선배들과 함께 <지젤>을 연기해 주목받았다. 입단 2년 만인 2012년 수석무용수로 발탁되는 등 국립발레단의 간판으로 <라 바야데르> <말괄량이 길들이기> 등에서 주역을 맡았다.
“한예종의 김선희·김혜식 선생님에 이어 국립발레단의 최태지·강수진 단장님을 비롯해 여러 선생님이 저를 키워주신 분들이에요. 그 덕으로 갓난아기가 이렇게 성장했으니까요.”
지난해 한국에서 초연됐던 <말괄량이 길들이기>가 그의 한국무대 고별작품이 됐다. “작년 공연 때 말괄량이 카타리나의 캐릭터가 잘 분석이 안 되더라고요. 보통 주역은 청순·가련형인데, 이건 똑똑하면서도 화를 내고 망가지는 역할이잖아요. 그래서 엘리자베스 테일러가 주연한 영화를 보고 캐릭터를 연구했어요. 그랬더니 왜 동생과 아빠한테 화를 내는지 이해가 딱 되더라고요.”
남자 주역을 맡았던 이재우는 동료이자 동갑내기 친구다. “파드되(2인무)에서 리프트 동작이 너무 어려웠어요. 서로 긁히고 상처 내고. (오른팔에 2㎝ 검은 상처와 손등에 손톱으로 찍힌 1㎝ 흉터를 내보이며) 제 팔 좀 보세요. 저랑 재우랑은 서로 의지하던 편한 친구였는데요, 재우가 그냥 축하한다고 하면서도 내심 섭섭할 것 같아요.”
미국 시즌 개막에 맞추려면 8월 초에 미국에 가야 하니까 집도 얻고 이것저것 준비해야 하지만, “가서 부딪쳐서 하면 되지 해요”. 성격 참 낙천적이다.
우연치곤 기막힌 일도 생겼다. 2011년 국립발레단 정단원 되자마자 맡은 첫 주역이 <지젤>이었다. 그런데 워싱턴발레단에서도 2016~2017 시즌 작으로 <지젤>을 올린다고 한다. “학교 때는 파드되만 했는데, 2011년 처음으로 광란 장면을 포함해 전막을 다하니까 너무 재미있었던 기억이 나요. 그런데 워싱턴에서 그 작품을 한다니 뭔가 운명적인 느낌이 오는데요. 호호호.”
손준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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