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1월 북간도 <윤동주의 묘>. 오늘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2009년 3월 전라남도 목포 <유달산>. 나의 첫 목포여행 1962년 7월.
▶소설가 김승옥의 그림 전시회가 열립니다. 그림은 글을 잃은 그가 의탁해온 언어입니다. 첫 한글세대 작가인 그는 우리말이 뿜는 감수성으로 동시대 작가와 독자들을 충격했습니다. 메마른 뇌를 심장의 박동으로 흔들었던 김승옥의 세련된 문장이 순한 수채화를 입었습니다. 그의 그림 60여점이 장마 속(7월8~21일 서울 종로구 혜화아트센터)에서 독자들을 기다립니다.
2009년 4월 섬진강 <쌍계사 십리 벚꽃>. 벚꽃 십리길 하얀 눈처럼 피어난 벚꽃.
2009년 6월 전라북도 부안 <남선염업염전>. 5월의 절정이 혀에 생생하게 와닿는 바다.
뿌연 것이 안개만은 아닐 것이다.
“해가 떠오르고 바람이 바다 쪽에서 방향을 바꾸어 불어오기 전에는 사람의 힘으로써는 헤쳐버릴 수 없었”(<무진기행>)다고 23살의 그는 썼다. “손으로 잡을 수 없으면서도 뚜렷이 존재했고 먼 곳에 있는 것으로부터 사람들을 떼어놓”던 안개가, “사람들로 하여금 해를, 바람을 간절히 부르게” 한다고 썼던 안개가 무진을 벗어나 노년의 그에게 스며들었는지도 모른다.
밝고 맑은 색을 입힌 수채화에 무진의 안개가 피어오르는 듯하다. 파도 부서지는 바닷가의 푸른 물빛에도, 노을 타기 직전의 노오란 하늘에도, 땅과 들을 덮고 약동하는 초록에도, 말을 잃은 소설가가 뿌린 조각난 언어가 안개처럼 어른거린다.
2009년 7월 경상북도 경주 <대릉원>. 김일제의 후손이 김승옥이다.
2009년 11월 경상북도 안동 <이육사문학관-원천리에 있던 생가>. 민족저항시인 이육사, 1943년 1월16일 차가운 감옥에서 숨을 거두었다.
김승옥은 글을 쓰지 않았다면 그림을 그렸을 것이라고 말하곤 했다. 초등학생 때 교사에게 그림 칭찬을 들은 뒤부터 그리는 일은 그를 지탱하는 한 축이 됐다. 1960년엔 경제신문에 시사만화 <파고다 영감>을 연재하며 생활비를 벌기도 했다. 2003년 친구 이문구(소설가)의 장례식장에 가다 뇌졸중으로 쓰러진 그는 펜을 놓친 뒤 붓을 쥐었다. 김승옥의 언어는 음절과 어절 대신 선과 면을 따라 떠오르거나 가라앉았다.
그는 서울 집과 순천만(전남 순천시)의 김승옥문학관을 오가며 지낸다. 순천에서 멀지 않은 전라도·경상도를 다니며 마음이 정박하는 풍경과 선배 문인들의 생가·시비를 물감으로 담아왔다.
2008년부터 2010년까지 60여점을 그린 뒤 새 그림을 내지 못했다. 지난해 말 전시와 책 출간을 논의할 때 100여점을 그려 보태겠다며 기운을 냈으나 추가된 그림은 없다. 완성된 그림만 모은 전시회(7월8~21일)가 서울 종로구 대학로(혜화아트센터)에서 열린다. 60여점 중 그가 짧은 설명을 붙인 그림은 14점이다. ‘보기에 예쁜 그림’에만 문장을 더했다고 한다.
2010년 9월 경상남도 통영 <유치환 시비>. 나는 고독하지 않다.
2010년 12월 평안남도 안주 <전봉건 초상화>. 가장 부드러운 목소리로, 가장 뜨거운 목소리로.
그가 도화지에 앉힌 것은 ‘무진 밖으로 나온 안개’일지도 모른다. 무진에서보다 훨씬 짙어진 안개, 청명한 색채가 가린 안개, 안개가 점령한 세계. 그의 문장을 가진 몇 점의 안개를 지면으로 붙들었다.
이문영 기자
moon0@hani.co.kr, 그림 사진 김승옥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