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억 판화가의 길이 10m 넘는 대작인 <남도풍색> 중 녹우당과 그 일대를 담은 부분. 이번 전시에서 가장 주목되는 득의작으로 꼽힌다.
한국화가 김현철씨의 신작인 <공재 윤두서 초상>(부분). 세로 길이 1m35의 긴 족자 비단에 진채로 그렸다. 공재의 자화상과 관련 문헌기록을 치밀하게 검토한 뒤 그린 역작이다.
한국 초상화의 최고 걸작인 국보 240호 공재 윤두서 자화상. 이 자화상에 대한 헌정 작품들이 이번 녹우당 전시를 통해 처음 한자리에 모였다.
전시가 열린 해남 녹우당 충헌각. 2010년까지 유물전시관으로 쓰였던 건물이다.
남도 해남의 뙤약볕은 질기다. 살갗을 쿡쿡 찌르는 햇살 아래 녹음 가득한 해남 덕음산 기슭으로 걸어간다. 산야 언저리에선 거름 냄새가 스며나왔다.
고산 윤선도, 공재 윤두서 등을 배출하며 조선 중후기 문예 중흥 밑돌을 놓았던 해남 윤씨 가문의 종택, 덕음산 자락 녹우당은 한결같은 푸르름으로 길손들을 맞아주었다. 요즘 그 주변에서는 이 가문의 옛 거장과 후대 작가들의 특별한 만남이 펼쳐지는 중이다. 녹우당에서 나고 자랐고, 말년에 돌아와 불세출의 명작인 자화상(국보 240호)을 그린 뒤 세상과 이별한 거장 공재 윤두서(1668~1715)를 기리는 전시다. 형형한 눈빛과 이글거리는 듯한 터럭의 묘사로 후대 한국 화단에 영감의 온상이 된 공재의 자화상에 바치는 현대미술가 18명의 신작들을 선보이는 기획전 ‘공재, 녹우당에서 공재를 상상하다’(해남 행촌문화재단 주최)가 지난달부터 고택 경내 충헌각에서 열리고 있다.
자욱한 매미 소리 들으며 충헌각 전시실로 들어가면 김억 판화가의 대작들에 눈길이 멎게 된다. 문인 고산 윤선도의 발자취를 따라 녹우당부터 보길도까지 이어지는 가로 길이 10m 넘는 대작 <남도풍색>과 다산 정약용의 발길이 오갔던 해남, 강진의 산록을 담은 세로축 병풍 12폭이 시선을 압도한다. 2012년 행촌재단의 남도아트프로젝트에 참가한 것을 계기로 작가가 2년 넘게 해남, 강진의 산야를 종으로 횡으로 달리며 인문답사기행을 벌인 여정이 담겼다. 8개월여 판각 작업을 거쳐 옹골찬 매무새의 진경 목판화 대작으로 결실을 맺은 것이다. 깔깔한 명암의 잔선으로 산세의 맥을 옮겨내고 골짝과 벌판, 바다를 오가는 다산, 고산, 공재 등 옛 선인들의 답사길과 사생하는 화가들, 고기 잡는 어부들 같은 지금 사람들의 움직임까지 화폭 속에 쟁여넣은 21세기 총체적인 진경그림이다. 전시현장에서 만난 작가는 “땅이 인간과 인생을 만든다는 것을 남도를 발품 들여 돌면서 절감했다. 자연이 안긴 터전 속에서 서로 부대끼며 살아온 이들의 인기척 있는 풍경이 가장 아름다운 그림감이라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고 털어놓았다.
한국화가 김현철씨의 <공재 윤두서 초상>은 김억 작가의 대작들과 더불어 이번 전시의 쌍벽으로 꼽을 만하다. 빈틈없는 묘사와 정갈한 배색, 엄숙한 느낌의 선비적 자태를 담은 그림이다. 간송미술관 연구원으로 조선 후기 진경산수화와 초상화를 공부한 작가는 옷 부분은 사라진 공재 자화상의 이미지를 바탕삼아 공재의 자화상에 얽힌 옛 기록들을 철저하게 분석했다. ‘긴 수염 나부끼는 얼굴은 윤택하고 붉구나’라며 공재 자화상을 상찬한 지인 담헌 이하곤의 글 등을 뜯어본 뒤 도포에 동파관을 쓴 선비의 온전한 전신상으로 새로운 공재 초상의 전형을 완성해냈다.
여성주의 작가 윤석남씨가 처음 먹붓으로 그린 자화상도 귀기 같은 혼기운이 와닿는 수작이다. 르네상스기 독일 작가 뒤러의 드로잉을 떠올리게 하는 예민한 선들로 자의식이 번뜩이는 일상적 자태를 담았다. 담담한 필치로 그린 듯하면서도 물결처럼 일어난 머리카락들과 치켜뜬 눈, 활력이 가득한 표정선의 흐름 등에서 대가의 내공이 느껴진다. 이외에도 해남 윤씨 가문의 살림살이를 떠받쳤던 종부들의 심정을 투영해 녹우당의 이끼 낀 연못을 주관적 색감으로 그려낸 방정아 작가의 <텅빈 연못>이나 부처, 동물, 인물상 등을 짜집기한 이미지로 인간의식의 심연을 조망한 김기라 작가의 콜라주 작품, 해남 미황사 만물공양 때 팥 한부대를 보시하는 할머니의 모습을 담은 이종구 작가의 그림 등이 전시장을 수놓았다. 필력과 작가의식 측면에서 모두 고른 수준이라고 평하기는 어렵지만, 각양각색의 상상력으로 공재 화풍의 성취를 계승하려한 참여작가들의 개성과 노력들이 엿보인다.
전시는 의미만큼이나 한계도 뚜렷하다. 무엇보다 출품작들은 공재 자화상과 동선상 바로 이어지지 않는다. 충헌각 아래 100m 떨어진 고산 윤선도 기념관 지하에 공재 자화상이 더부살이를 하고 있어서다. 전시를 기획한 행촌문화재단 쪽은 애초 기념관에 출품작을 같이 전시하는 방안을 생각했지만, 운영을 맡은 해남군 쪽의 완강한 입장에 부딪혀 구상을 실현시키지는 못했다는 후문이다. 충헌각 전시또한 협소한 공간 탓에 김억 작가의 판화 대작은 표지만 보여주고 대부분 접어놓은 채 전시하는 등 품격 있는 기획전의 틀은 갖추지 못했다. 해남 윤씨 문중에서는 최근 공재미술관 건립사업을 추진 중이다. 아쉬움이 남는 녹우당의 첫 현대미술 전시는 공재를 재조명하기 위한 미술관 건립이 왜 필요한지를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10월3일까지. (061)530-8281. 해남/글·사진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도판 나무화랑, 행촌문화재단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