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컬 한 편은 대체로 3시간을 넘지 않는다. 현재 공연 중인 작품들을 보면 쉬는 시간(인터미션) 포함 150~170분 정도다. 그 이상을 넘으면 작품이 늘어지기도 하거니와 관객들 역시 지친다. ‘아이고 허리야’ 소리가 절로 나오지 않을까.
가을을 두드리는 장대비가 내리던 8월31일 서울 강남구 광림아트센터 장천홀에서는 무려 5시간의 릴레이 공연(10분씩 쉬는 시간 4번 제공)이 열렸다. 견딜 수 있을까 싶은 이 공연을 보러 온 50명의 용감한 관객들이 있다. 놀라운 건 직접 관람 신청을 했을뿐더러 8 대 1의 경쟁률을 뚫었다는 사실이다.
이들은 ‘뮤지컬 인큐 리딩 공연’(연출 정태영)의 관객심사단. ‘뮤지컬 인큐’는 신인 창작자와 콘텐츠 기업을 연결해 작품의 기획·제작·유통 전 과정을 지원하는 한국콘텐츠진흥원 ‘우수 크리에이터 발굴 지원 사업’의 일환이다. 이 사업에 참여한 알앤디웍스가 지난 5월부터 신인 창작자들을 대상으로 서류·면접심사를 실시했고, 선정된 5개 팀을 대상으로 현업 종사자들의 멘토링 등을 제공했다. 그 결과 히스토리팩션에서 판타지 로맨틱코미디까지 다양한 장르의 창작 뮤지컬 5편이 각 50분간의 리딩 공연 기회를 갖게 됐다. 리딩 공연이란 개발 단계의 작품을 말 그대로 대본을 읽어가며 관객들에게 미리 선보이는 자리다. 전문심사위원 6명의 점수 70%와 관객심사단 점수 30%를 더해 뽑힌 3편은 내년 쇼케이스 무대에 설 수 있다. 창작 뮤지컬 지원사업에서 관객들의 심사를 반영하는 것은 이례적이다.
리딩 공연 중인 뮤지컬 <해담아 반딧불이 보러와>의 배우들.
공연장은 마치 시험장같이 시종일관 진지한 분위기였다. 50명이 동시에 종이와 펜을 들고 앉아 있는 모습은 다른 공연장에선 볼 수 없는 진풍경이었다. 채점지를 받칠 데가 마땅치 않자 무릎, 휴대전화, 앞좌석 뒷받침대 등을 활용하기도 했다. 전문심사단이 음악성, 작품성을 주로 본다면 관객심사단은 트렌드와 재미 등을 중점으로 평가했다고 알앤디웍스 쪽은 밝혔다.
한 번도 세상에 선보인 적 없는 날것의 작품, 그것도 미완성인 작품을 보러 기꺼이 긴 시간을 투자한 관객심사단들은 어떤 이들일까. 김윤진(30·휴직)씨는 이제껏 본 뮤지컬만 100여편에 지난해에만 200회 정도 공연을 본 뮤지컬 팬이다. 그는 공연 시작 전 “한 작품의 태동기를 보고 원석을 발견할 수도 있는 자리”라며 리딩 공연에 대한 기대감을 밝혔다. 그는 “어디서 본 듯한 작품 말고 새로운 소재와 이야기로 참신함을 뽐내는 작품 위주로 보려고 한다”며 자신의 심사기준을 명쾌하게 설명했다. 대학생 장아무개(24)씨는 “한정판을 맛보는 기분”이란다. 정식 공연으로 올라오기 전에 미리 볼 수 있다는 것이 리딩 공연의 매력이라고 했다.
최근 뮤지컬 리딩 공연이 많아지고 있지만 가고 싶다고 다 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이하나(24·대학생)씨는 “이전에도 여러 번 리딩 공연 신청을 했지만 당첨된 건 이번이 처음”이라며 “3시간이 넘어가니 몸이 찌뿌듯했지만 참고 봤다”고 말했다. 그 역시 2010년부터 꾸준히 한 달에 4번 이상 공연을 보는 ‘뮤지컬 덕후’(뮤덕)다. “내가 평가한 작품이 정식 무대에 서면 마치 내 자식처럼 느껴지지 않을까요?”
이번 공연은 배우에게도 특별했다. 마지막 차례로 무대에 선 뮤지컬 <세븐>의 배우 조형균은 “관객분들이 직접 선택했다는 의미에서 최종 3편에 뽑히면 더 보람있을 것 같다. 관객에게 심사받기는 처음인데 마치 신제품 세일즈맨이 된 기분”이라고 소감을 밝혔다. 전문심사위원으로 참여한 배우 오만석은 “공연은 관객의 소리를 듣는 것이 기본이다. 관객들과 작품의 가능성을 함께 만들어가서 고무적”이라고 말했다.
우려의 목소리도 있다. 뮤지컬 평론가 원종원 순천향대 교수는 “시장의 반응을 예측할 수 있다는 점은 장점이지만 관객들을 너무 의식하다 보면 작품의 다양성이나 실험성이 대중성에 밀릴 수도 있다”고 말했다.
5시간의 ‘극한 관람’이 끝나고, 자리를 떠나는 관객들의 손에는 글자가 빼곡히 찬 채점지가 손에 들려 있었다. 흔히 ‘뮤덕’이라고 하면 스타 캐스팅만 좇거나 대형 라이선스 공연에 몰린다는 선입견이 있다. 이날 본 관객들은 창작·라이선스, 대형·소형 할 것 없이 그저 ‘좋은 작품’에 목말라 있을 뿐이었다. 심사 결과는 6일 ‘뮤지컬 인큐’ 누리집 등을 통해 발표할 예정이다.
이유진 기자
yjlee@hani.co.kr, 사진 알앤디웍스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