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세기 덴마크 왕자가 21세기 여자 ‘함익’으로 환생했다. 배우 최나라는 연극 <함익>에서 재벌 2세이자 대학교수인 함익 역을 맡아 인간 내면의 근원적인 고독을 연기한다. 사진 세종문화회관 제공
지난 1일 서울 세종문화회관 연습동 3층. 분명 귀에 익은 햄릿의 대사 같지만, 조금 다른 대사가 흘러나왔다. “죽느냐 사느냐, 그것은 문제가 아니야. 살아 있는가 죽어 있는가, 그것이 문제야.”
12세기 덴마크 왕자 햄릿이 21세기 ‘함익’으로 환생했다. 그런데 치마를 입은 32살 여성이다. 연습이 끝난 뒤, 함익 역을 맡은 최나라 배우한테 ‘살아 있는가 죽어 있는가, 그것이 문제’라는 말의 뜻을 물었다.
“(죽느냐 사느냐처럼) 선택을 고민하는 데서만 끝나는 건 아니죠. (살아 있는가 죽어 있는가의 문제는) 비록 실패할지라도 삶을 주체적으로 사느냐, 의지와 상관없이 가면을 쓰고 죽어 있는 삶을 사느냐의 문제죠. 함익이란 인물한테는 가장 중요한 대사인 것 같습니다.” ‘죽느냐 사느냐’가 고유명사 햄릿이 선왕의 죽음에 대한 복수를 고민하며 던지는 질문이라면, ‘삶다운 삶을 살 것인가, 죽음 같은 삶을 살 것인가’는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모든 인간이 근본적 고민과 고독에 처한 상황에 대한 물음이다. 이 연극에서 12세기 왕자 대신 젊은 여성이 주인공이 되는 배경이다.
셰익스피어 원작의 <함익>은 대학로를 대표하는 작가 김은성이 쓰고 서울시극단 김광보 예술감독이 연출한다. 김 작가는 햄릿의 고독한 심리와 섬세한 여성성에 주목하고, 주인공 함익을 ‘햄릿으로 태어나 줄리엣을 꿈꾸는 여성’으로 재창작한다. 원작의 장황하고 시적인 대사도 뭉텅뭉텅 쳐내 속도감 있는 단문으로 뽑아냈다. 겉으로 함익은 화려하다. 재벌 2세에 연극학과 교수지만, 아버지와 계모가 어머니를 자살로 몰고 갔다고 믿는다. 그래서 함익의 내면은 고독한 복수심으로 가득하다.
<함익>에서 주인공을 맡은 최나라. 사진 세종문화회관 제공
앙다문 입술은 위엄이 있고, 입을 열면 또박또박 정확한 발음. 정면을 응시하면 반짝이는 눈빛, 하지만 웃으면 곧바로 무장해제시키는 표정. 2004년 배우의 길로 들어선 최나라의 첫인상이다. 2008년 서울시극단에 입단해 2013~14년 위안부 문제를 다룬 연극 <봉선화>의 주인공 순아 역과 올해 <헨리 4세>에서 퍼시 부인 역을 맡아 호평을 받은 바 있다.
“남자든 여자든, 아픔이 있든 없든, 인간은 늘 고독한 것 같아요. 남이 볼 때 작아 보여도 본인에게는 큰 아픔이기 때문이죠. 애인이, 친구가, 부모가 있어도 외롭잖아요. 누군가의 진실한 위로가 있더라도 결국 싸워야 하는 건 자신이거든요. 이 작품은 한 여자가 고통과 분노를 거쳐 비극으로 치닫는 과정, 그 과정에서 줄리엣을 꿈꾸고 싶을 만큼 흔들리게 하는 남성을 만나지만, 그걸 다 배제하고 인간의 본연의 고독과 마주하는 여성 햄릿을 그렸습니다.”
최나라가 읽은 대본의 핵심이다. 기존의 햄릿 해석은 인간적인 고독 말고도 정치적인 문제의식, 시대상의 반영 등을 포함했지만 <함익>에선 인간 내면의 심리적인 고독에 초점을 맞췄다. 대사 중 “햄릿은 인간의 목소리로 신의 노래를 부르는 고독한 전사다”라는 대목이 나온다. 김 작가가 함익의 고독을 다루는 열쇳말로 보인다.
최나라는 12년 연극 인생의 최고작으로 서슴없이 연극 <봉선화>를 꼽는다. “위안부 할머니들을 다룬 이 작품에서 주인공 순아 역할을 했어요. 2013년 실제 할머니들의 증언을 토대로 만든 희곡을 처음 읽던 날, 모두 울었어요. 배우로서 생각의 전환점이었죠. 연극의 힘이 예술성과 대중성만이 아니라, 사람들의 의식을 깨우고 뭔가 작용을 해주는 역할이 있다는 걸 강하게 느꼈어요. 2014년 4월과 12월 재공연을 거듭하면서, 또 세월호 사건이 터지면서 연극의 역할을 새삼 소중하게 느끼게 됐어요. 제 연기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작품입니다.” 이달 30일~10월16일 서울 세종문화회관 엠씨어터. (02)399-1794.
손준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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