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9일 밤 서울 대학로 예술가의집 3층에서 열린 하우스콘서트 500회 연주회에서 피아니스트 김선욱이 연주하고 있다.
183명의 관객이 마룻바닥에 앉았다. 엉덩이로 음악을 들었다. 바로 2~3m 앞에서 피아니스트 김선욱(28)이 쿵쾅쿵쾅 건반을 두드렸다.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29번(함머클라비어)이었다. 마루를 거쳐온 피아노의 ‘망치질’은 엉덩이를 지나 가슴을 때렸다. 김선욱의 광대뼈 아래로 반짝! 한 점 땀이 빗금으로 흘러내렸다. 연주자의 미풍 같은 한숨, 미세한 손끝의 떨림, 페달의 진동까지 관객과 호흡했다. 지근거리에서 감각기관의 효과를 극대화한 눈과 귀, 아니 온몸. 대형 콘서트홀에선 결코 맛볼 수 없는 하우스콘서트만의 묘미다.
19일 저녁 서울 대학로 예술가의집 3층, ‘하우스콘서트’(하콘) 500회 연주회가 열렸다. 하콘은 2002년 7월12일 서울대 작곡과 출신의 박창수(52) 하우스콘서트 대표가 서울 연희동 살림집 거실에서 시작했다. 이후 광장동, 역삼동, 도곡동을 거쳐 현재 예술가의집에 자리 잡았다. 14년 2개월간 중단 없이 민간이 주체가 돼 하콘을 진행해온 것은 한국 공연사에서 주목할 만한 성과다. 2012년부터 전국 곳곳으로 연주공간을 확장한 하콘은 지난해부터 전세계를 대상으로 ‘원먼스페스티벌’을 열고 있다.
김선욱은 하콘 최다 출연자다. 16살이던 2004년 2월13일(48회) 첫 출연 이래, 독주·듀오·갈라를 포함해 모두 15번 하콘 무대에 섰다. 그동안 출연자는 정경화·조성진을 비롯해 모두 2300명, 관객은 3만명이다.
16살 때부터 하우스콘서트 무대에 섰던 피아니스트 김선욱(왼쪽)과 박창수 하우스콘서트 대표. 두 사람 사이엔 깊은 신뢰가 흐른다.
김선욱에게 하콘은 최다출연자 이상의 의미가 있다. 어린 자신에게 연주기회를 마련해주고, 세계적인 연주자로 성장하는데 ‘동반자’였기 때문이다. 아직 이마에 송글송글한 땀이 가시지 않은 그에게 ‘하콘과 나’를 들었다.
“만으로 16살 때였으니까 독주회 기회가 많지 않았어요. 그래서 프로그램 독주회를 열 수 있었던 게 저한테는 굉장한 의미였어요. 지금까지 (하콘 출연을) 계속하는 것도 옛날의 마음이 지금도 변치 않았고, 여기서 제 초심을 볼 수 있는 공간이기 때문이지요.”
밑바탕에는 김선욱과 박창수 대표 간의 믿음이 깔렸다. “박창수 선생님이 이런 하우스콘서트에 대한 명분과 의지가 확실하시니까 (제가) 더 믿고 할 수 있는 거 같아요. 지금까지 14년째 하콘을 해오셨지만, 그 이후 수많은 하우스콘서트가 생겼다가 없어지기를 반복했거든요. 하콘이 그만큼 꾸준한 거죠. 이제 500회에 저를 불러주시니까 무척 고맙습니다.”
박 대표는 본인 말대로 ‘미련’할 정도로 꾸준했다. 이날 인사말과 사회관계통신망(SNS) 글을 통해 “얼마 전 눈앞이 뱅글뱅글 도는 어지럼증이 심해져 119에 실려갔습니다”라면서도 “500회에 이르는 동안 어떤 일이 생기더라도 하콘에는 단 한 번도 빠지지 않았습니다”라고 강조했다. 하지만 “성실이 미련함이 되어선 안 되겠다는 생각에, 어쩌면 경우에 따라 앞으로 한, 두 번 빠질지도 모르겠습니다”라며 자신에게 조금은 ‘관대’해진 모습도 보였다.
이날 김선욱이 연주한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29번 ‘함머클라비어’는 지난해 첫 독주 앨범에 담을 만큼 그의 대표곡으로 꼽힌다. 쉴새없이 두드리는 ‘건반 망치질’은 피아니스트는 예술가이면서 노동자라는 생각을 불러일으켰다. 앞서 그는 모차르트 피아노 독주곡 ‘론도 K.511’을 들려줬다. 연주를 마친 김선욱이 두 손을 들었다 내리자, “앙코르!” 함성이 마룻바닥을 치고 솟았다.
혼과 신명을 담은 소리꾼 장사익의 절창은 183명의 객석을 단박에 사로잡았다. 그는 “박창수 대표와 같은 동네에 산다”고 인연을 소개했다.
2007년 하콘 관객이 된 채정희(36)씨는 그해 연말 갈라 콘서트를 잊지 못했다. “저는 클래식을 접할 기회도 없었는데, 피아노에 가장 근접한 위치에 앉아 김선욱씨 연주를 듣고 푹 빠져버린 거에요. 그 후 본의 아니게 선욱씨 공연을 10년 동안 따라다녔네요.” 채씨는 “하우스콘서트를 통해서 내가 몰랐던 다양한 음악들을 만날 수 있어서 가장 좋았어요. 하콘이 한 개인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꿈꾸는 내일이 됐으면 좋겠습니다”라고 했다.
이날 연주회 2부는 1부와 전혀 달랐다. 장사익(67)은 가슴에 꼭꼭 쟁여둔 인생의 깊이를 절창으로 풀어냈고, 한과 신명이 어우러진 유행가 가락으로 좌중을 휘어잡았다. 마종기의 시에 붙인 곡 ‘상처’가 속을 긁어내 토하는 절창이었다면, 대중가요 ‘대전블루스’의 간주 부분에 넣은“사모님, 가정을 버리세요”라는 추임새는 저잣저리 현대 민요의 차진 후렴구였다.
손준현 기자
dust@hani.co.kr, 사진 하우스콘서트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