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보지체크>에서 보이체크가 억압받는 상황을 흰 띠에 묶인 모습으로 표현하고 있다.
호객꾼과 원숭이들이 자동차를 타고 달려왔다. 원숭이들이 길바닥에 나뒹굴며 꽥꽥! 소리친다. 극장 밖에서 기다리던 관객들은 잠시 당황하다, 파안대소한다. 행인들은 무슨 재미난 구경거리냐며 눈이 휘둥그레졌다. 호객꾼과 원숭이들이 관객들을 극장으로 몰아넣는다. “이제 곧 시작합니다. 여러분 모두 외쳐 보세요, 극단 신세계의 보지체크!” 호객꾼의 말을 따라 관객 일동 “보지체크!”
발음하기 민망한 제목의 연극 <보지체크>가 지난 22일 막을 올렸다. 여성 성기를 제목에 쓴 국내 첫 연극이다. <버자이너 모놀로그>라는 작품이 있었지만, 결코 <보지의 독백>이 될 수 없었다. 원작은 독일 작가 게오르크 뷔히너의 <보이체크>로, 표현주의적 드라마의 효시로 꼽힌다. 대위의 이발사이자 의사의 실험 대상으로 생계를 꾸리는 가난한 병사 보이체크가 주인공. 그는 아내 마리와 아이를 위해 모욕을 꾹 참고 살지만, 군악대장은 그의 아내를 유혹한다.
김수정 연출은 원작의 이야기를 여러 갈래로 늘렸다. 우선 마리와 보이체크가 각각 3명이다. 원작의 보이체크와 마리를 한 축으로 두되, 배우들은 과거와 현재, 독일과 한국이라는 시공간을 넘나들며 인간과 원숭이의 역할을 번갈아 보여준다. 원작에서 마리를 유혹하는 악대장은 선배 배우로 나와 후배 여배우를 성적으로 착취한다.
다소 복잡한 설정에도, 메시지는 명료하다. 성적 착취의 대상으로서 여성과 여성의 성기에 대한 자기결정권이다. 한 배우가 “저기요, 보지를 보지라고 부르는 게 잘못된 건가요?”라고 했다. 그 옆 배우가 “이 보지는 내 것입니다. 남의 보지가 아니라 나의 보지입니다”라고 받았다. 또 그 옆 배우는 “내 보지 내가 알아서 하겠다는데 왜들 자꾸 뭐라고 하는 건데요?”라고 되묻는다. 세 배우가 동시에 “여러분, 이 보지는 내 것입니다. 나의 보지입니다. 내가 알아서 할게요”라고 절규한다.
연극 <보지체크>에는 아예 객석 의자가 없는데다 배우들이 60분 내내 관객들을 이동시킨다.
하지만 이런 절규가 나오기까지 설명은 친절하지 못하다. 성적 표현 수위는 높지만, 성적 착취와 그에 맞선 자기결정권을 주장하기까지 과정을 그려내는 치밀함은 없다. 대신, 원숭이와 인간을 번갈아 보여주며 인간의 동물성을 강조하는 데 치중한다. 세밀화와는 거리가 먼 휙휙! 그려낸 크로키에 가깝다.
되레 이 작품의 미덕은 형식과 표현력에 있다. 이 작품은 스탠딩 연극이다. ‘ㄱ’자 모양의 무대에는 객석이 아예 없어, 서서 봐야 한다. 천장에서 바닥으로 수십 개의 흰 띠를 묶고, 그 사이에서 배우들이 움직인다. 흰 띠는 억압과 속박의 상징. 배우들은 그 띠에 묶여 표현력을 확장하고, 관객은 띠 사이로 관극하는 불편을 견뎌야 한다. 배우들은 무대의 모서리와 중앙을 옮겨다니며, 관객들을 계속 다른 쪽으로 몰아낸다. ‘안주’하거나 ‘착석’하지 못하는 관객은 60분 동안 배우들에게 끌려다니며 강제로 몰입할 수밖에 없는 구조다.
연극을 보고 나면 “그럭저럭 괜찮았다” 또는 “별로였다” 등의 반응이 나온다. 그런데 극장문을 나서며, 내용과는 별개로 ‘센’ 연극이라는 느낌이 든다. 김수정 연출과 극단 신세계는 그동안 <인간동물원초> <그러므로 포르노> <멋진 신세계> 등을 통해 표현력의 한계에 도전해왔다. 10월2일까지 서울 대학로 소극장 혜화동1번지. 070-8276-0917.
손준현 기자
dust@hani.co.kr, 사진 극단 신세계 제공
이 작품에는 원작 <보이체크>와 달리 3명의 마리가 등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