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가 개막한 지난 24일 도쿄 다마미술대 미술관 3층에 내걸린 신작 <산책> 연작 앞에서 유근택 작가(왼쪽)와 전시를 기획한 미네무라 도시아키 관장이 담소하고 있다.
“일본 미술계에서는 나올 수 없는 그림입니다. 무언가 끊임없이 생동하고 있어서 눈을 뗄 수 없어요.”
일본 화단의 작가, 평론가들은 중견 한국화가 유근택(51)씨의 불온한 풍경 그림과 인물화들을 일일이 뜯어보면서 놀라워했다. 방에 거대한 코끼리가 어슬렁거리고 숲에 유령 같은 사람 흔적들이 떠돌며, 불길 같은 나무들이 천장 곳곳에 스멀거리는 풍경 그림의 도발적 면모들이 전통 먹붓질의 호흡을 잃지 않은 채 펼쳐졌다는 점이 신기한 듯해 보였다. 전통 문인화의 깔깔한 선묘를 바탕으로 대기감을 표출하는 선염(번짐) 기법을 자유자재로 활용해 일상의 시간과 공간에 대한 상상력을 풀어놓는 21세기 한국화의 진경 앞에서 그들은 좀처럼 자리를 뜨지 않았다. 도쿄예술대에서 동양회화와 미술품 보존·수복기법을 강의해온 아라이 게이 작가는 “그림의 본질에 끊임없이 도전하는 자세를 느낄 수 있었다. 그런 태도가 많은 일본 현대 작가들에게 영향을 줄 거라고 확신한다”고 소감을 밝히기도 했다.
지난 24일 낮 일본 도쿄도 서쪽 다마시에 있는 다마미술대 미술관 2, 3층에서는 현재 한국 화단의 대표작가로 꼽히는 유씨의 대형 초대전이 미네무라 도시아키 관장을 비롯한 일본 화단 관계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막을 올렸다. ‘소환된 회화의 전량’이란 제목 아래 차린 이번 초대전은 1990년대부터 지금까지 전통회화의 계승과 시대, 일상의 리얼리티(현실성) 재현이란 화두를 붙잡고 문제작들을 양산해온 작가의 20여년 화력을 다룬다. 문인화 구도와 기법, 재료의 실험, 그리고 90년대 이후 한국 사회의 일상 풍경의 변화를 추적한 60여점의 구작, 신작들로 그의 작업 전반을 살펴보는 회고전 형식이다.
국내 소장작가 회고전을 일본 명문 미대에서 모든 비용을 들여 초대했다는 점이 우선 예사롭지 않다. 일본 미대는 미술사적 평가를 따져, 작고 거장들에게도 회고 전시를 잘 해주지 않는다. 다마미술대는 일제강점기 권진규 등 국내 근대 화가들이 상당수 유학했던 제국미술학교의 후신으로 권옥연, 이쾌대 등 국내 대가들의 전시가 추진됐지만, 대부분 무산되고 2012년 권진규 조각가의 회고전이 유일한 선례였다. 무사시노미술대의 박형국 교수는 “이번 회고전은 일본 미술계에서 다마미술대가 사고를 쳤다고 할 만큼 사건으로 회자되고 있다. 다마미술대에서 유근택 작가의 독창적인 작품 세계를 높이 평가해 파격적 기획을 한 것”이라고 했다.
전시장은 두 영역으로 구분된다. 초창기 먹물이 튀는 파묵 기법 등을 써서 자화상과 돌아가신 할머니의 만년 모습을 담은 연작들이 2층 안쪽에, 들머리엔 숲을 산책하는 군상들이나 실내에 펼쳐진 온갖 집기들, 사물들, 식기들의 괴기스런 이미지들을 그린 연작들을 볼 수 있다. 작가는 2000년대 중반 이후 일상 공간에 놓인 사람, 사물, 식물이 뿜어내는 보이지 않지만 강력한 기운과 공간의 미세한 흐름에 집중하면서 재료와 화폭 등의 실험적 시도들이 복합된 이미지를 그려내왔다. 3층이 이런 흐름을 대변하는 방과 서재, 숲 풍경 등의 신작들로 채워졌다. 이우환 작가와 함께 일본의 60년대 모노파 현대미술운동을 주도한 이론가였던 미네무라 관장은 “2000년 한국 국립현대미술관 젊은 작가전에서 유 작가의 그림을 처음 본 뒤로 20년 가까이 그의 전시들을 빠짐없이 찾아가 봤고 평을 쓰면서 유 작가는 내 존재의 일부가 되어버렸다”고 극찬했다. 채색화가 전통을 이룬 일본에는 거의 없는, 몸의 호흡과 기운을 중시하는 문인화의 기풍과 현대미술의 실험성이 공존하는 화풍을 진일보시켜왔다는 점이 가장 큰 매력이라고 했다.
유 작가는 “작품 전량의 소환이라는 제목과 구성이 마음에 든다. 일상의 시공간 틈새에서 시대상을 새롭게 형상화하려는 작가의 의도를 가장 적절하게 짚어준 것 같다”고 만족감을 표시했다. 전시는 12월4일까지. 도쿄 다마시/글·사진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도쿄 다마미술대 미술관의 유근택 초대전 전시 현장. 2002년 먹으로 그린 자화상 연작들의 파격적인 이미지들이 한눈에 들어온다.
다마미술대 미술관의 유근택 초대전 전시장. 2004년 대작 <마루-또다른 정원의 일부분>(왼쪽)과 2002년 작 <샤워> 연작들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