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에 검열에 맞선 연극인들의 릴레이 공연 <권리장전 2016 검열각하> 현수막. 사진 검열각하 제공
문화예술인에 대한 검열에 항의해 지난해 연극인 1천여명이 서명했다. ‘대학로X포럼’을 통해 공동대응에 나섰고, 극장에 있어야 할 연극인들이 거리로 뛰쳐나왔다. 정부는 발뺌하며 뭉갰다. 겨울을 지나 올해 봄 연극인들은 릴레이 공연으로 다시 정부와 ‘맞짱’을 떴다.
검열 철권에 맞서는 연극의 주먹 ‘권리장전2016_검열각하’(검열각하)가 5개월의 대장정을 마쳤다. 6월9일부터 10월30일까지 144일간 21개 팀 332명의 22개 작품을 110회 공연했다. 한국 연극사에 유례없는 저항의 무대였다. 정부의 표현자유 억압에 맞선 저항이었지만, 상업화와 무기력이라는 연극계 자체 문제와 맞선 싸움이기도 했다.
연극 <검열언어의 정치학: 두 개의 국민>의 한 장면. 사진 검열각하 제공
#연극 통한 장기간·조직적 저항
릴레이 공연의 직접적 계기 중 하나는 2013년 박근형 연출의 연극 <개구리>가 박정희 전 대통령과 박근혜 대통령을 풍자했다는 이유로, 지난해 한국문화예술위원회(예술위)가 그의 다른 작품을 지원 선정에서 배제한 것이었다. 또 문학창작기금 지원에서 심사위원이 뽑은 이윤택 연출가의 작품 <꽃을 바치는 시간>을 탈락시켰고, 다원예술창작지원 심사에서도 세월호를 다뤘다는 이유로 윤한솔 연출의 <안산순례길>을 제외했다. 마찬가지로 예술위 산하 한국공연예술센터는 지난해 말 세월호를 연상시킨다는 이유로 ‘팝업씨어터’ 공연을 중단·방해했고, 곧이어 국립국악원은 박근형 연출의 출연을 배제했다.
‘검열각하’는 집회나 선언이 아닌 연극을 통해 유례없이 장기간, 대규모, 조직적 저항을 벌임으로써 한국 연극사에 잊히지 않을 한 페이지를 썼다. 특히 후원 모금과 관객의 자발적 참여로 힘을 키웠다. 후원자 427명이 5천만원 가까운 제작비를 낸데다, 공연마다 1만원 입장료를 낸 관객이 7천명에 육박했다. 김소연 연극평론가는 “발의자나 참여팀뿐 아니라 관객 모두 함께 만든 작업”이라고 했다.
연극인들에게는 실로 엄청난 경험이었다. 김미도 연극평론가는 “지난해 검열 사태가 터지고 1천명이 넘게 서명해도 정부는 무응답으로 일관했다. 투쟁 동력을 잃고 검열 이슈가 묻히는 가운데, 연극인들이 ‘무모한 투쟁’을 벌여 성공적으로 마무리했다”고 평가했다.
공연 막바지에 청와대가 내려보낸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전모가 공개됐다. 검열각하가 이런 드라마틱한 전환을 선도한 점은 누구도 부인하지 못한다.
연극 <이반검열>의 한 장면. 사진 검열각하 제공
#검열에서 캐낸 민주주의 의미
검열각하 릴레이 공연은 ‘검열’만 빼면 백지상태나 다름없었다. 검열과 맞서되, 다양한 형식과 발언을 자유롭게 쏟아냈다. 이 무대는 연극인들에게 검열 비판을 넘어 민주주의의 가치를 각성하는 계기로 작용했다.
김수희 검열각하 총연출은 “연극인들이 연대해서 검열이라는 사회이슈를 공유하고 민주주의라는 가치를 되새기게 한 것은 뜻깊다. 특히 연극인들은 ‘최순실 게이트’를 계기로 표현자유 확보를 넘어 민주주의 가치라는 주제를 지속적으로 논의하려 한다”고 의미를 짚었다.
첫 테이프는 김재엽 연출과 드림플레이테제21의 <검열언어의 정치학: 두 개의 국민>이 끊었다. 김종덕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박명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위원장 등 ‘문화계 검열’의 주체들과 피해자인 박근형 연출은 물론 예술위원장을 인터뷰한 기자 이름까지 실명으로 등장했다.
<검열언어의 정치학>, <15분>, <불신의 힘> 등은 검열 사태를 재현해 다뤘다. <그러므로 포르노>, <자유가 우리를 의심케 하리라>, <해야 된다>, <괴벨스 극장>, <검은 열차> 등은 검열의 본질을 추궁했다. 검열의 역사나 개념을 톺아보는 작품으로는 <이반검열>, <시민L>, <씨시아이쥐케이>, <대한국사람>이 꼽힌다. <검열관과 털>, <바보들의 행진>, <그때 그 사람>, <금지된 장난>은 검열을 한껏 풍자했다. 검열각하를 기획한 고주영 피디는 “공동창작이 많았고 드라마보다 구성에 집중하는 포스트드라마, 다큐멘터리적 작품이 많았다”고 분석했다.
김미도 평론가는 “시간에 쫓기며 만들었지만, ‘올해 베스트 3’ 등에 꼽힐 만한 작품이 국립극단 등 공공극장 것보다 많다. 검열언어의 정치학, 이반검열, 괴벨스극장, 씨시아이쥐케이 등은 미학적 성과도 전혀 뒤쳐지지 않는다”며 연극 전반의 미학적 완성도에도 높은 점수를 줬다. 그는 “검열각하는 연극의 사회적 역할을 돌아보고, 젊은 연출가들의 현실의식, 실험정신을 회복하는 계기가 됐다. 비판적인 주제의 연극으로도 상업적으로도 성공할 수 있음을 보여줬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후반부로 가면서 작품 질이 떨어졌다는 평가도 나왔다. 22개 작품을 모두 본 양근애 연극평론가는 “작품의 질은 편차가 컸다. 검열의 역사적 과정, 현 정치 상황 등을 세분화해 작품을 올렸으면 더 좋았겠다는 지적도 있다”고 말했다.
손준현 기자
dust@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