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파란나라>는 집단주의가 판치는 공동체 ‘파란나라’를 통해 우리 안의 파시즘을 성찰하게 하는 작품이다. 사진 남산예술센터 제공
“파란나라를 보았니/ 꿈과 사랑이 가득한 나라~” 학생들은 벅찬 가슴으로 종주먹을 흔들며 제창했다. 더 이상 힘없고 못생기고 공부 못하는 ‘좆밥’들이 아니었다. 이 노래는 차별이 없는 공동체 ‘파란나라’의 집단 결속력을 다지는 곡이다. 대체 어떤 집단일까?
16일 막오른 극단 신세계의 <파란나라>(김수정 작·연출)는 통제불능의 ‘2016년 대한민국’의 교실을 보여줬다. “씨발, 존나, 씹새”라는 욕설과 폭력이 난무하며 새 신발을 뺏어 신고 빵셔틀·껌셔틀의 권력관계가 판치는 한국 사회의 축소판이다. 이 생생한 현장은 배우들이 중·고등학교 연극 교사를 하면서 수집하고, 교사·학생들과 토론하며 취재한 것이다.
여기에 제자의 흡연을 용인하지만 되레 학생한테 두들겨 맞는 ‘좆밥 선생’이 등장했다. 이 기간제 교사는 히틀러와 파시즘을 얘기하지만 학생들은 들은 척도 않았다. 그는 학생들을 집중시키기 위해 ‘게임’을 시작했다. “훈련을 통한, 공동체를 통한, 실천을 통한 힘의 집결”이라는 구호를 표방한 집단 ‘파란나라’는 순식간에 학교 전체로 퍼졌다.
‘파란나라’의 구성원은 모두 평등했다. 성적 학대를 받던 보경이도, ‘껌셔틀’에 시달리던 창현이도 집단의 보호막 속에서 이제는 두렵지 않았다. 하지만 학생들은 집단의 힘을 자신의 힘으로 착각하고, 집단의 이익을 자신의 이익보다 우선시했다. 사찰을 담당하는 학생을 둬, 집단 이익에 반하는 구성원에겐 ‘감시와 처벌’이 이뤄졌다. 차별을 없애자고 만들었지만 ‘차별과 배제’가 잦아졌다. 흰옷의 제복을 맞춰 입고 흰옷을 입지 않으면 따돌렸다. 집단에 들지 못한 세인이는 끝내 자살했다.
연극 <파란나라>는 집단주의가 판치는 공동체 ‘파란나라’를 통해 우리 안의 파시즘을 성찰하게 하는 작품이다. 사진 남산예술센터 제공
<파란나라>의 미덕은 첫째 꼼꼼한 학교현장 취재다. 하지만 가장 특징적인 것은 압도적인 무대다. 배우 58명이 외치는 구호와 제창, 객석 바로 옆자리에서 뛰쳐나오는 ‘파란나라 당원’, 객석 뒤를 포위한 ‘당원’들의 함성이다. 파시즘과 집단주의의 공포를 간접체험하는 장치다. 장면전환 때마다 등장하는 태극기는 국가주의에 대한 경고다.
사실 신세계는 표현주의의 극단(極端)에 선 극단(劇團)이다. 관객이 불편하도록 표현을 극단까지 몰고 간다. <그러므로 포르노>에선 바닥의 흥건한 물을 배우가 마시도록 해 관객이 연극 중단을 요구했고, <멋진 신세계>에선 전라 장면이 등장하는가 하면, <보지체크>에선 폭력적인 장면이 잦았다.
연극의 구성은 다소 헐겁다. 왜 그런 집단주의를 커다란 거부감 없이 수용하는지, 집단주의를 거부한 학생은 왜 자살을 하는지 친절하게 설명하지 않는다. 예상한 대로 결말은 한 전학생의 말로 끝난다. 집단의 외부자임을 자처하는 전학생은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었겠어요?”라고 책임을 회피한다.
파시즘은 침묵과 복종을 먹고 산다. 에리히 프롬은 <자유로부터의 도피>에서 독일인이 혁명으로 세운 바이마르공화국(1919~1933년) 대신 나치를 지지함으로써 ‘자유’를 버리고 ‘복종’을 선택했다고 썼다. <파란나라>는 그 책을 떠올리게 했다. 27일까지 서울 남산예술센터. (02)758-2150.
손준현 기자
dust@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