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대 맹인과 50대 여성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연극 <황혼>은 진실과 거짓, 성속, 희비극을 넘나들며 90분 내내 극적 긴장을 유지한다. 사진 연희단거리패 제공
70대 맹인(명계남)의 열 손가락에 빨강, 노랑, 파랑, 초록 콘돔이 끼워졌다. 정체가 애매한 50대 여성 야스민(김소희)이 그렇게 했다. 노인의 ‘몸가락’은 이미 발기되지 않지만, 갑자기 손가락이 천장으로 곧추섰다. 고무 재질의 피임기구가 가장 익살스럽고 낭만적인 장면을 연출했다. 대체 둘의 정체는 뭘까?
채윤일이 연출한 연극 <황혼>은 오스트리아 작가 페터 투리니 원작으로 국내 초연이다. 서울 게릴라극장에서 11월11일 무대를 열어 12월4일 종연했다. 두 남녀는 진실과 거짓, 성속, 희비극을 넘나들며 사랑하고 어긋난다.
불이 꺼지고 연극이 시작할 때까지 암흑과 정적이 오래 계속됐다. 전라의 맹인이 등을 보인 채 바닥에 누워 있다. 오랫동안 움직이지 않다가 더듬더듬 안경을 찾아 쓴다. 간이침대엔 어젯밤 도착한 맹인협회 여성 사무원이 곯아떨어져 있다. 40여년 동안 알프스 산속에서 살며 관광객을 위해 뻐꾸기 소리를 내 돈을 버는 맹인, 그리고 맹인에게 책을 읽어주고 (가능하다면) 섹스까지 제공하러 온 사무원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고독한 맹인은 부유층 출신에 미국 유학파에다 유명 연출가라고 뻥을 친다. 창녀, 배우이며 맹인협회 사무원인 여성도 수수께끼이긴 마찬가지. 이 애매모호함이 ‘빤한 결말’을 유예시키며 90분 내내 극적 긴장을 끌고 가는 힘이다. <로미오와 줄리엣>의 그 유명한 발코니 대사를 읊는 대목은 아름답다.
오랜만에 연극 무대에 선 명계남은 특유의 어눌한 발음과 허세 가득한 카리스마로 거짓말쟁이 70대 맹인을 잘 소화했다. 사진 연희단거리패 제공
명씨인데다 명연기를 보여준다고 ‘명배우’로 불리는 명계남은 오랜만에 연극 무대에 섰다. 특유의 어눌한 발음과 허세 가득한 카리스마는 배역과 잘 맞아떨어졌다.
“극중 여배우의 대사에도 나오지만 무대에 서지 않아도 난 늘 배우라고 생각하며 살아왔습니다. 배우는 무대에 살아야 한다는 이윤택 선생의 제안으로 마치 처음 연기하듯 떨리는 마음으로 무대에 섰습니다.” 명계남은 “투리니라는 작가를 만나서 매 순간 흥분하고 변신하며 연기하는 재미가 있었습니다. 무엇이 진실이고, 거짓인지를 찾아 헤매기보다 극중 인물과 자연인 명계남의 거리와 합치 사이에서 줄타기하는 재미가 있었습니다”라고 했다.
김소희와는 연세대 동아리 선후배로, 1989년 동문 합동 공연 <우리읍내>(오태석 연출)에서 한 차례 호흡을 맞춘 적이 있다. “(김소희는) 더할 수 없는 훌륭한 배우지요. 배우가 연기할 때 상대와 눈을 마주치면 그 배우의 기를 느낍니다. 무대에서 수시로 상대 배우를 압박해오는 기운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객석에서 보는 그녀보다 더 훌륭하고 아름다운 배우입니다.”
연희단거리패 대표인 김소희는 탁월한 변신력으로 캐릭터에 생생한 숨결을 불어넣었다. 그는 ‘명배우’가 “영원한 청년”이라고 했다. “저는 언제나 극장에 있었기 때문에 극장 밖의 세계를 놓치지 않으려고 긴장합니다. 연극 속에, 연기 속에 함몰되지 않으려고요. 명계남 선배님은 연극 속에만 연극적 진실이 있지 않다는 것을 확인시켜주는 배우입니다. 함께하는 많은 순간 극장이 확장되는 속시원한 체험을 했습니다. ‘저분은 영원한 청년이다’라고 생각했죠.” 여주인공 야스민에 대해선 “여자로서, 배우로서 지독하게 소외된 인물입니다. 하지만 그 소외 속에서 자신의 존엄을 지키려 고군분투합니다”라고 했다.
올해 공연은 끝났지만, 내년 봄 다시 무대가 열린다. 이윤택 연희단거리패 예술감독은 “관객 반응이 좋아 내년 4월 앙코르 공연을 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손준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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