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와 파리 오케스트라의 음악감독을 지낸 거장 크리스토프 에셴바흐가 서울시향과 함께 베토벤 교향곡 9번 <합창>을 연주한다.
시민들이 촛불을 들었다. 독재에 맞서 자유를 외쳤다. 2016년 한국 얘기가 아니다. 1989년 10월9일 옛 동독 라이프치히, 7만명의 함성이 거리를 울렸다. 경찰이 무력진압을 위협할 때, 콘서트홀 ‘게반트하우스’의 문이 열렸다. 쿠르트 마주어(1927~2015) 게반트하우스 오케스트라 음악감독이 시위대에게 피신처를 내준 것이다.
1990년 10월 독일 통일 기념식에서 마주어는 ‘촛불과 자유’의 정신을 담아 베토벤(1770~1827) 교향곡 9번 <합창>을 지휘했다. 앞서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1989년 12월 독일·프랑스·영국·러시아 출신으로 구성된 연합 오케스트라는 베를린에서 <합창>을 연주했다. 4악장 “모든 인간은 형제가 되노라”라는 실러의 노랫말이 현실이 되는 순간이었다.
당시 지휘자 레너드 번스타인(1918~1990)은 “환희, 신이 내린 아름다운 축복”이라는 노랫말을 “자유, 신이 내린 아름다운 축복”으로 바꿔 부르게 하고 “베토벤도 이를 축복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합창> 4악장은 1985년 유럽연합의 공식 국가로 채택됐다.
2016년 세밑에도 나라 안팎에서 여전히 <합창>이 울린다. 국내는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로 뒤숭숭하지만 한국만 우울한 것은 아니다. 반이민주의와 미국 우선주의로 대표되는 영국의 브렉시트(유럽연합 탈퇴)와 도널드 트럼프의 미국 대통령 당선은 ‘모든 인간은 하나’라는 베토벤이 강조한 인류애와 반대 흐름으로 가고 있다.
<합창>은 히틀러의 나치 정권에 의해 체제 선전도구로 악용되기도 했다. 선전상 괴벨스는 제2차 세계대전을 가리켜 “독일의 위대한 문화유산 베토벤을 수호하는 성전”이라고 떠벌렸고, 나치 정권의 음악협회장 리하르트 슈트라우스는 ‘바이로이트 축제’를 이 곡으로 개막하게 했다.
10대 후반 프랑스혁명을 맞은 베토벤은 자유와 진보의 승리라는 소신을 필생의 역작 <합창>에 담았다. 4악장 합창 부분이 자유와 인류애라면, 2악장 ‘스케르초’(해학) 부분은 ‘진보의 승리’다.
노승림 음악칼럼니스트는 “베토벤은 스케르초를 통해 인류 진보의 승리를 암시한다. 과거에는 치명적이었던 비극과 사건이 오늘날에는 하찮고 미미한 에피소드가 되어 웃어넘길 수 있을 만큼 우리가 진보했다는, 인류의 승리를 확신한 것이다. 교향곡 9번의 스케르초는 대미를 장식할 실러의 ‘만민 형제’ 선언의 전조를 나타낸다”고 설명했다.
베토벤 교향곡 9번 <합창>을 연주하는 서울시향.
촛불을 든 2016년 한국의 세밑, 지금까지 인류애로만 듣던 <합창>이 자유와 진보의 노래로 들린다. ‘시민혁명’으로 가는 길목, 여러 목소리의 <합창>이 관객을 기다린다.
크리스토프 에셴바흐가 지휘하는 서울시립교향악단은 28·29일 서울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연주한다. 소프라노 캐슬린 김, 메조소프라노 양송미, 테너 김석철, 베이스 김지훈, 국립합창단, 서울모테트합창단, 안양시립합창단 협연으로 상반기에 일찌감치 매진됐지만 ‘네이버 생중계’를 통해 무료로 감상할 수 있다. 요엘 레비가 지휘하는 케이비에스(KBS)교향악단은 29일 충남 천안예술의전당, 30일 서울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합창>과 <합창환상곡>을 선사하고, 제임스 저드가 지휘하는 대전시립교향악단은 28·29일 대전예술의전당 아트홀에서 <합창>을 연주한다.
앞서, 박영민이 이끄는 부천필하모닉오케스트라는 21일 부천시민회관 대공연장에서 소프라노 강혜정, 메조소프라노 이아경, 테너 진성원, 베이스 전승현, 부천시립합창단과 함께 <합창>을 협연하고, 정치용이 지휘하는 인천시립교향악단은 23일 인천종합문화예술회관 대공연장에서 <합창>을 포함해 베토벤 곡들을 들려준다. 손준현 기자
dust@hani.co.kr, 사진 서울시향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