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시립미술관 3층에 차려진 이 미술관의 역대 전시 자료 전시인 ‘세마(SeMA) 전시아카이브 1988-2016’의 일부분. 김홍희 현 관장의 인터뷰 동영상과 그의 임명장, 머리카락 등을 기념액자에 넣은 사사 작가의 작품이 내걸려 있다.
서울시립미술관 1층에서 열리고 있는 ‘X:1990년대 한국미술’전 전시장. 박혜성 작가가 94년 처음 제작한 ‘비누비너스’ 설치작품과 만화 등을 확대한 이동기 작가의 90년대 팝아트 그림들이 보인다.
용머리였다가 뱀꼬리로 끝나려는가.
2012년 1월 서울시립미술관장에 취임한 김홍희(68) 관장은 대중과 교감하는 ‘포스트뮤지엄’을 전략 삼아 ‘시스템으로 움직이는 미술관’을 만들겠다고 다짐했다. 그러나 내년 1월 퇴임을 앞둔 그의 결산성적표 열쇳말은 ‘퇴색’이다. 애초 다짐이 무색할 만큼 임기말 그가 내보인 전시들은 갈피 잡기 힘들다는 인상을 갖게 한다.
16일 미술관 2, 3층에서 개막한 한-불 수교 130주년전 ‘르누아르의 여인’은 단적인 일례다. <경향신문> 창간 70돌 전시를 겸해 신문사와 미술관이 공동주최했지만, 실제로는 한 신생 기획사가 세계 각지 미술관, 개인이 소장한 인상파 거장 르누아르의 대작, 소품 40여점을 빌려와 차린 상업 블록버스터 전시다.
이 전시는 민간 기획사 대관전을 하지 않겠다고 김 관장이 4년 전 일성으로 밝힌 애초 운영 구상과 크게 어긋난다. 김 관장은 취임 당시 회견에서 숱한 서양 명품 대여전시로 ‘대관 전문’이란 오명이 붙었던 미술관 전시를 자체 기획 중심으로 바꾸겠다고 공언했다. 이에 따라 지난해까지 ‘세마(미술관 약칭) 삼색전’ 등을 통해 이런 구상을 나름 실행해왔고, 서양 고전 명품을 소개하는 대관 전시 요청은 불허해왔는데, 이 원칙이 깨진 것이다. 특히 이번 전시에서 작품 대여에 관여한 이는 김 관장 재임 전 미술관에서 숱한 서양미술 대관전을 열었던 기획자 ㅅ씨여서 미술계를 의아하게 만들고 있다.
ㅅ씨는 김 관장의 대관전 불허 방침을 겨냥해 미술관은 시민에게 열려 있어야 한다고 공개 비판하며 그동안 미술관과 각을 세워왔다. 미술관 쪽은 ㅅ씨가 공식 기획진에서 빠지지 않으면 전시를 해줄 수 없다고 고집해 개막일을 열흘 남겨두고 ㅅ씨를 빼는 조건으로 전시계약이 성사됐다는 후문이다. 한 전시 관계자는 “서구 미술관에 잘 알려진 ㅅ씨의 이름을 걸고 작품을 빌리기로 했는데, 그의 이름을 빼고 다시 대여 계약을 맺는 과정에서 주요 작품을 내기로 했던 일부 미술관이 대여를 거절해 어려움이 컸다”고 털어놨다. 애초 리플릿 등에 대표작으로 소개됐던 <부지발의 무도회>(미국 보스턴미술관 소장) 같은 중요 작품 서너점은 이런 이유로 출품이 무산됐다.
김 관장은 “블록버스터를 아예 안 하겠다고 했던 건 아니다. 시의회 등에서 대중이 볼 수 있는 명품 전시를 해달라는 요구도 해서 수용한 것으로, 상황이 바뀌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의 취임 당시 가장 큰 주목을 받았던 블록버스터 전시 억제란 명분이 사실상 뒤집어진 데 대해 공개 해명을 해야 하지 않았느냐는 지적이 나온다.
미술관 1층에서 시작한 중견작가 기획전 ‘X:1990년대 한국미술’도 기획의 메시지와 맥락이 거세된 자료전시에 그쳤다는 비판이 제기된다. 이 전시는 대중소비문화의 시대를 맞아 다원적인 지평을 열어갔던 90년대 한국 미술을 87~96년의 시공간으로 좁혀 바라다보고 있다. 그사이 펼쳐진 다양한 소그룹 운동과 청년 작가들의 활동공간, 이불, 고낙범, 이동기, 이윰 등 당시 유력 작가들의 작업들을 재등장시켜 당대의 미술 흐름을 짚어보려는 뜻이지만, 구성의 빈틈이 크다. 최정화씨와 그의 공간 ‘살’ 등 당대 최고 스타 작가들의 작품 상당수가 빠졌고, 당시 미술판에 결정적 영향을 주었던 93년 휘트니비엔날레 서울전과 95년 태동한 광주비엔날레, 초창기 대안공간 등에 대한 부분들도 거의 언급되지 않아 맥락을 찾기 힘든 추억 돋기식 전시에 가깝다. 한 중견 기획자는 “대표미술관에 걸맞은 큐레이팅의 격조도, 신뢰감도 보여주지 못한 전시라, 임기말 관장의 판단이 너무 안일하다는 생각이 든다”고 했다.
3층에 차려진 미술관 역대 전시 자료 기획전 ‘세마(SeMA) 전시아카이브 1988-2016’은 한술 더 떠 역대 관장의 치적에 대한 자화자찬식 설명과 자료들로 들어차 있다. 안쪽 진열장에 김 관장의 인터뷰 동영상과 관장 임명장, 머리카락 등을 기념액자에 넣어 내건 사사 작가의 오마주풍 작품은 아래층 전시와 얽혀 낯설고 민망한 이미지로 다가온다. 글·사진 노형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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