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찰차벽 앞에서 춤출 때의 그 ‘자유로움’을 표현해 보고 싶었다. 경찰차벽과 함께 춤을. 2016년 12월, 펜, 33.5×24.5㎝.
나는 인왕산과 한옥과 적산가옥과 빌딩과 옛 골목길과 큰길이 뒤범벅이 되어 있는 우리 동네를 그리는 ‘동네화가’다. 뉴미디어로 실험적인 작업을 하는 작가나, 민중의 모습을 절절하게 그려내는 화가나, 상상력을 동원해 기발한 작업을 하는 작가들 앞에 서면, 괜히 기가 죽는다. 내 그림이 창피하게 느껴질 때도 있다. 나이가 들어서 시작한 만큼, 내가 그리고 싶은 걸 실컷 그리면 된다는 생각으로 늘 당당하지만, 도대체 동네를 그린다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이런 그림이 미술사적으로 의미가 있기라도 할까? 나도 ‘시대정신’을 찾아내 그리는 그럴듯한 작가가 돼야 하는 거 아냐? 하는 생각에 빠져들기도 한다.
아무도 없는 방에 혼자 있을 때,
펑펑 눈물 흘리며,
그리워할 수 있는 것이 아닌 걸,
그려내는 일이 너무 어렵다
지난해 11월부터 주말이면 촛불 들고 시위대를 따라다니고, 춤으로 세상의 해방을 꿈꾸는 ‘도시의 노마드’ 춤 친구들과 함께 춤췄지만, 주중에는 매일매일 옥상에 앉아 동네 풍경을 그렸다. 날씨가 추워져 전망 좋은 카페에 앉아 효자동 쪽을 바라보며 그리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눈앞에서 경찰차들이 앞뒤로 왔다갔다 한다. 힘들게 요리조리 열을 맞추던 경찰차들이 눈 깜짝할 사이에 1센티미터의 차 간격도 허용하지 않는 경찰차벽을 만들어냈다. 자하문로 은행나무 가로수들과, 상점 간판 뒤에서 삐죽 모습을 보이는 기왓집 지붕을 그리고 있던 나는, 너무나 당황스러웠다. 그리던 풍광이 순식간에 바뀌어 버렸기 때문이다. 그렇게 내 동네 그림 속으로 경찰차벽이 훅! 하고 들어왔다.
그 후 경찰차벽은 수시로 동네에 출몰했다. 촛불시위대와 청와대를 가로막는 권위와 불통의 상징이기도 했지만, 동네 친구들이 코앞에 있는 집을 몇백미터나 돌아가게 만드는 얄미운 존재…. 경찰차벽은 어느새 익숙한 동네 풍경의 하나가 되었다. 촛불을 높이 들고 구호를 외치며 청와대로 향하는 시위대와 함께.
난생처음 딸과 함께 참석했던 촛불집회. 그날은 유독 촛불이 더 따뜻하게 느껴졌다. 촛불 모녀. 2016년 12월, 펜&수채, 19×24㎝.
딸과 함께 시위 현장에 나간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2002년 월드컵 때 어린 딸과 축구 응원하러 광화문에서 함께 목청을 높인 적은 있지만, 정치적인 이슈로 광화문에서 함께 목청을 높여 보기는 처음이었다. 무채색이고 객관적인 풍경이었던 시위 현장에 딸이 들어오자, 촛불이 더 따뜻하게 느껴졌다. 딸과 함께 촛불을 드는 건, 뭐랄까, ‘사회 변화’에 대한 내 더 깊숙한 곳의 갈망이 시위 현장에 함께하는 느낌이었다. 더 간절한 촛불이 되는 느낌.
아직 사회적인 이슈를 직접적으로 캔버스에 담아내는 그림을 그리는 일이 힘들다. 아무도 없는 방에 혼자 있을 때, 펑펑 눈물 흘리며, 그리워할 수 있는 것이 아닌 걸, 그려내는 일이 너무 어렵다. 고백하건대, 민주주의를 갈망하지만, 혼자 방에 앉아, 눈물 뚝뚝 흘리며, 민주주의를 위해 잘 울지 못한다. 젊은 시절 그런 자신이 창피해 일부러 통일을 위해, 노동자에 대한 차별 철폐를 위해 우는 연습을 오래오래 숨어 했지만 쉽지 않았다. ‘거짓부렁’의 느낌으로는 그릴 수가 없다. 지금 내 가슴을 터지게 하는 것들부터 하나씩 그려나가는 수밖에 방법이 없다.
탄핵 시국에서 우리 동네 일상적인 풍경이 되어 버린 경찰차들. 경찰차벽이 만들어지기 직전의 상황이다. 경찰차가 있는 효자동 풍경. 2016년 12월, 펜, 33.5×24.5㎝.
이제 조금씩 조금씩 새로운 그림들을 그리고 싶어졌다. 동네 슈퍼 앞을 가로막고 있는 경찰차벽 위에서 딸과 함께 추는 춤, 흐물흐물 흘러내리는 경찰차를 밟으며 인왕산으로 동네 친구들과 함께 걸어가는 춤, 장난감처럼 작아져 버린 경찰차벽과 깔깔거리며 노는 춤, 친구들과 손 붙잡고 경찰차벽을 넘어 끝없이 달려가는 춤, 딸과 함께 따뜻한 촛불을 들고 동네를 날아다니는 춤…. 그런 온갖 이미지들을 그려내 보고 싶어졌다. 나는 동네화가니까. 우리 동네에서, 지금, 진행되고 있는 바로 내가 있는 풍경이면서 우리 모두의 풍경이니까.
▶ 김미경 27년간 직장생활을 하다, 쉰네살이 되던 2014년 전업 화가를 선언했다. 서촌 옥상과 길거리에서 동네 풍광을 펜으로 그려 먹고살고 있다. 전문적인 미술교육을 받지 않고, 스스로 성장해가는 화가다. 전시회 ‘서촌 오후 4시’(2015년)와 ‘서촌꽃밭’(2015년)을 열었다. 각박한 현실에서 꿈을 접고 사는 사람들에게, ‘지금 당장’ 꿈을 향해 떠나고 싶은 충동을 느끼게 해주는 존재다. 자신이 사는 동네를 그려낸 따뜻한 작품과 그 뒷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꿈을 향한 각자의 발걸음이 더 빨라질 듯싶다. 격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