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랙리스트 버스’ 참가자들이 지난달 11일 세종시 정부세종청사 문화체육관광부 앞에서 검은 가면을 쓰고 항의 예술 행동을 하고 있다. 세종/김태형 기자 xogud555@hani.co.kr
박정자 한국연극인복지재단 이사장이 지난달 26일 ‘문화계 블랙리스트’와 관련해 고백을 했다. 2015년 7월 연극인 일자리 지원사업 최종심사를 앞두고 문화체육관광부로부터 ‘특정 단체에 대한 자격 없음 통지를 받고 시일이 촉박해 확인·소명 절차 없이 심사에 반영(탈락)’했던 일을 사과하는 내용이다. 박 이사장은 “‘블랙리스트’와 연관되어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그 경위와 입장을 밝힘으로써 예술 검열에 관한 역사기록에 동참하기로 하였습니다”라고 뒤늦은 공식입장 공개 배경을 설명했다.
박 이사장의 첫 ‘고백’을 계기로, 블랙리스트 실행 주체인 한국문화예술위원회(예술위) 등 정부기관 책임자의 ‘블랙리스트 실행 고백과 사과’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김기춘 전 대통령 비서실장과 김종덕·조윤선 전 문체부 장관의 구속에 이어 박명진 예술위원장의 사퇴를 요구하는 주장도 확산되고 있다. ‘블랙리스트 부역’에 대한 정부기관 실행 지휘자들의 책임 인정과 사과를, 박근혜 정부에 의해 훼손된 표현자유의 회복과 문화예술 지원사업 투명 운영의 출발점으로 삼아야 한다는 지적이다.
박영수 특검의 블랙리스트 수사 결과를 보면, 정부에 껄끄러운 예술인에 대한 지원 배제 지시는 청와대→문체부→예술위 등 공공기관으로 순차 하달됐다. 이에 따라 블랙리스트 작성과 전달을 주도한 김기춘, 김종덕·조윤선 전 장관이 차례로 구속됐지만, 블랙리스트 실행 주체인 예술위의 박명진 위원장의 공식사과나 박 위원장에 대한 공개적인 수사는 없었다. 문화예술계에서 “김기춘·김종덕·조윤선은 구속됐는데, 박명진은 왜?”라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문화예술계는 현재 박 위원장 등 산하기관장들의 총사퇴를 요구하고 있다. 이달 초 김미도 연극평론가는 언론 기고를 통해 “예술위원회는 블랙리스트를 구체적으로, 직접적으로 실행한 핵심 기관이다. 권영빈 전 위원장과 박명진 현 위원장은 결코 이 책임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며 박 위원장을 정조준했다. 2015년 예술위 심의위원으로 참여했던 김 평론가는 박근형 연출가의 <모든 군인은 불쌍하다>에 가해진 예술위의 압력과 관련해 “블랙리스트의 실행 과정이 얼마나 악랄하고 집요했으며, 우리 시대 최고의 예술가를 얼마나 고통스럽게 했는가를 기록”하려고 글을 썼다고 밝혔다.
블랙리스트 집행자들의 책임 인정과 사과를 요구하는 현장 예술가들의 요구도 거세다. 지난해 검열에 맞선 연극인들의 릴레이 공연 ‘권리장전2016-검열각하’에서 <검열언어의 정치학: 두 개의 국민>을 상연했던 김재엽 연출은 “예술위, 문화융성위, 예술인복지재단, 국립극장, 국립극단, 정동극장 등에서 기관장이나 위원 혹은 예술감독 등을 역임하거나 재임 중인 공인들은 블랙리스트에 대해 어떻게 대처했는지 공개적으로 밝힐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검열각하’에서 <씨씨아이쥐케이>를 올렸던 이양구 작가 겸 연출도 “박 이사장과 김 평론가와 마찬가지로, 다른 기관장과 다른 심의위원도 블랙리스트를 받았는지, 어떻게 대처했는지 어쨌는지 자신의 입으로 얘기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 해 2000억원의 문예진흥기금을 집행하는 예술위 위원장은 문체부 장관이 위촉한다. 박명진 위원장은 최순실 인맥인 김종덕 전 장관의 박사 논문 지도교수였다. 이명박 정부 시절 ‘보수편향적 심의’ 논란을 빚었던 방송통신심의위원장을 지냈다. 지난해 국감에서는 블랙리스트와 관련한 위증 혐의와 예술위 전체회의 회의록을 삭제·조작한 혐의로 국회 교육문화체육관광위원회로부터 고발당했다. 한편 예술위 관계자는 “조만간 블랙리스트에 대한 입장을 내놓을 예정”이라고 밝혔다.
손준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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