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미술사의 절정’ 전에 나온 겸재 정선의 대표작 <박연폭도>(개인 소장).
근대 이래 미술의 역사는 인연들이 겹치고 겹쳐 만들어진다. 작가만이 주역은 아니다. 작품의 가치를 꿰뚫어보는 미술사가와 세간에 발굴한 작품들을 전시로 알리는 미술관 혹은 화상(화랑업자)이 거들어야 한다. 작품을 사서 소장하며 유명세를 쌓는 수집가가 맞들면 명작은 제 이름을 남기며 후대에 길이 전해지게 된다.
새봄을 앞두고 서울 인사동 화랑가에 등장한 노화랑의 기획전 ‘한국미술사의 절정’은 이런 미술사의 인연들이 쌓여 이뤄낸 작품 마당이다. 지난 연말 정년퇴임한 미술사가 이태호 명지대 명예교수의 기획으로 15일부터 시작한 전시의 출품작들은 16점. 하나하나가 18세기 전통미술과 20세기 한국 근현대 회화를 묶는 개인 수장가들의 절세 명품들이다.
문 열고 들어가면 ‘비대칭의 균형감’으로 유명한 18세기 달항아리 두점과 요사이 미술시장에서 최고의 인기를 누리는 김환기의 점화들이 맞아준다. 달항아리 2점은 아랫굽이 허물어지거나 한쪽 허리가 불룩 튀어나오거나 슬쩍 일그러진 자태가 도공이 부린 자연스런 전위감각을 드러내고 있다. 달항아리의 미를 가장 일찍 간파하고 점화에 녹여낸 김환기의 벽면 작품들이 아취를 더해준다.
2층에 오르면, 벽력 같은 폭포소리가 귀대신 눈을 울리는 겸재의 <박연폭도>를 마주하게 된다. 먹을 층층이 겹쳐 칠한 적묵법으로 폭포 물살 주위 암벽의 기골장대한 남성적 면모를 치켜세우고, 폭포 물살의 잔결들을 마른 먹붓질로 묘사해 소리의 공명을 절묘한 시각적 대비로 바꿔놓았다. 옆에 내걸린 천재화가 단원의 <죽하맹호도>는 털 한올한올도 세필로 묘사한 조선적 사실주의의 진수다. 이 두 점만으로도 18세기 조선회화의 우뚝한 성취를 알 수 있다. 후반부는 20세기 민족 수난기 시절의 애잔한 일상 기억이 담긴 이중섭과 박수근의 소품들과 만나면서 갈무리된다.
국민화가 이중섭의 말기 걸작으로 꼽히는 유화소품 <복사꽃 가지에 앉은 새>(개인 소장).
이 교수의 출품작 선정기준은 국내 국·공·사립 미술관에 없는 최고작품을 고르는 것. 국내 개인 수장가의 컬렉션 중 최고 명품으로 첫손에 드는 겸재의 <박연폭도>와 단원의 <죽하맹호도>가 자연스럽게 목록에 올랐다. 근대 작품 가운데는 지난해 덕수궁미술관의 이중섭 전시 당시 관객들 조사에서 가장 좋아하는 작품으로 꼽힌 <복사꽃 가지에 앉은 새>와 개인소장 은지화 두점이 지목됐다. 박수근은 <여인>과 <책 읽는 소녀> 같은 유명 소품 외에 노화랑의 노승진 대표가 비장해온 <산동네>, <초가집> 등이 포함됐다. 이우복씨와 이헌씨 등 국내 명망있는 중견 컬렉터들과 오랜 친분을 갖고있는 노 대표의 마당발 인맥 덕분에 준비 1년만에 야간 경비와 400억원대의 ‘싼’ 보험료를 조건으로 이 걸작들을 빌려와 내걸 수 있었다고 한다. 이 교수는 “이중섭, 박수근, 김환기가 겸재, 단원의 그림과 달항아리에 보이는 조선의 전통미를 어떻게 현대화했는지 살펴보는 것이 감상의 포인트”라며 “내가 보기엔, 내면에서 나오는 강렬한 표현욕구가 출품작들의 공통점인 것 같다”고 말했다. 28일까지. (02)732-3558.
글·사진 노형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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