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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음악·공연·전시

늪속 깊이 파묻혀버린 욕망의 근원

등록 2005-11-09 17:00수정 2005-11-10 15:17

리뷰 - 극단 물리 ‘고양이 늪’
갑작스런 찬 기운에 겨울의 문턱을 실감하는 요즘, 아일랜드의 황량한 겨울을 연상시키는 연극 한편이 무대에 오르고 있다. 차가운 바람과 그리움, 상실과 죽음에 대해 이야기하는 마리나 카 원작의 <고양이 늪>이다. 1998년 아일랜드 국립극장에서 초연되면서 고대 비극 <메데이아>의 모티브를 아일랜드 일상 속에 펼쳐놓았다고 알려진 작품이다. 현대 연극이면서도 신화와 예언, 기억과 죄의식이 공존하는 연극이다.

한국 초연인 이 공연에서 연출가 한태숙은 약 3시간 분량의 희곡을 1시간40분으로 줄이면서 등장인물의 내러티브를 보여주는 대사의 많은 부분을 이미지로 대체했다. 아르코 예술극장 대극장 무대(미술감독 이태섭)는 <맥베드>나 <리어왕>의 비극이 펼쳐질 듯 황량하고 스산한 늪지의 풍경을 보여준다. 깊은 무대 뒤편에는 앙상하게 가지만 남은 나무들이 안개에 싸인 푸른 조명 속에 흩어져있고, 무대 앞 오른쪽 귀퉁이에는 여주인공 헤스터의 트레일러가 놓여있다. 좁은 다리 하나가 무대 안쪽에서부터 뻗어 과거와 현재, 무의식과 의식 세계를 이어준다.

에우리피데스의 <메데이아>에서 메데이아는 이아손에게 반해 아버지를 속이고 남동생을 죽이면서 이아손을 구하고 그의 아내가 된다. 마침내 이아손이 자신을 배신하고 젊은 공주와 결혼하려 하자 이 새 신부와 자신의 어린 자식들을 살해하고 그를 떠난다. <고양이 늪>에서 헤스터 스웨인(서이숙)은 카싸지(지현준)의 배신에 저항하다가 자신의 분신인 딸(하지혜)과 자기 자신을 파괴하고 만다.

남녀간의 투쟁, 그 섹슈얼리티의 드라마는 언제나 우리의 흥미를 끈다. 그러나 <고양이 늪>의 물밑에는 더 깊은 감정의 소용돌이가 있다. 어릴 적 떠나버린, 부재하는 어머니에 대한 원초적 갈망이 그것이다. 헤스터의 남동생 살해나 딸의 살해는 모두 어머니에 대한 감정에서 비롯한다. 헤스터의 강한 자기연민 역시 어머니로부터 버림받았다는 사실에서 나온다.

‘고양이 늪’은 여성의 생명성을 강하게 느낄 수도 있는 공간이다. 늪, 그 점액질의 액체는 모든 생명이 생성되는 무정형의 카오스일 수 있으므로. 그러나 이 작품에서 고양이 늪에는 불모의 기운이 돌고 죽음의 냄새만이 난다. 마을 사람들은 불가능한 욕망, 근친을 향한 출구 없는 욕망에 집착한다. 그런데 공연은 속삭임과 같은 이 인물들의 섬세한 욕망을 드러내지 못하고 평면적 묘사에 그쳐 전반적으로 욕구불만을 일으킨다. 인물들은 신화적 원형을 넘어서지 못한다. 연출가는 인물간의 갈등 속에 있는 욕망의 근원을 잘 찾아내지 못했으며 회화적 이미지에 과도하게 의존한다.

메데이아 혹은 헤스터 스웨인, 우리 주변에 살고 있는 이 여성들. 이들은 모두 주변의 억압을 뚫고 자신의 기질을 지키며 살기 원했다. 그것이 자신에게 치명적인 것이 될지라도. 이들의 삶이 진정으로 가능해지는 날은 언제일까.

노이정/연극평론가 voiver@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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