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물관 3층에 나온 12세기의 각종 청자철화과형병들. 서민과 귀족층에서 널리 쓰인 철화청자는 고급 상감청자보다는 색감이나 모양새의 정교함이 떨어지는 편이지만, 생명력 넘치는 무늬의 역동성과 파격성이 도드라진다.
처음 보면 칙칙하고 덤덤한데, 다시 보면 힘차고 사랑스럽다.
12~13세기 고려시대의 철화청자들은 한국 미술사의 숨은 ‘별종’이다. 우리의 대표 문화유산으로 널리 자랑해온 고려 상감청자와 때깔과 기법이 크게 다르다.
왕족, 귀족들이 호사스럽게 썼던 상감청자는 저 유명한 하늘빛 비색과 우아한 모양새에, 표면에 문양의 홈을 파고 다채로운 색깔을 입힌 상감기법을 더해 만들어졌다. 하지만 철화청자는 서민들이나 지식인들이 술병, 물병, 유병, 저장용기로 주로 썼던 생활용품이라, 투박한 외형에 모래를 정제해 구할 수 있는 검푸른빛 철화안료를 써서 자유분방한 무늬를 표면에 휘휘 부려넣은 것이 특징이다. 청자 재료인 태토의 질이 떨어져 상감 같은 파내기식 기법보다는 좀더 명료한 이미지를 낼 수 있는 철화안료의 무늬로 미감을 불어넣은 것이다. 기법의 정교함은 다소 떨어지지만, 꽃·새·풀 등의 자연물을 소재로 한 철화백자 무늬의 역동성이야말로 한국 미술에 풀뿌리처럼 이어져온 강인한 활력을 증거한다. 지난 21일부터 서울 강남구 신사동 호림박물관 분관에서 열리고 있는 특별전 ‘철, 검은 꽃으로 피어나다’전은 철화청자의 매력을 한껏 누릴 수 있는 미술사의 향연이다. 2~4층 전시장에 나온 철화청자 200여점은 화병, 물병, 대야, 대접, 난간, 유병 등의 다양한 모양새에 문양을 더해 빚어낸 고려 도자미술의 또다른 상상력을 보여준다.
12세기께의 청자철화서과문호. 수박 모양을 한 항아리다. 단순하게 슥 그어진 푸른 줄무늬가 담백한 아취와 정감을 자아낸다.
관람의 요체는 생명력 넘치는 철화청자 무늬들의 기기묘묘한 조형 세계를 음미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2층 전시장에서 처음 관객을 맞는 청자대야인 ‘청자철화수초어문대반’은 그릇 한가운데 국화 세 송이가 피어난 소담한 자태를 보여주지만, 3층 들머리의 ‘청자철화모란당초무늬난주’는 보기 드문 건축 난간 부재로 막 뻗어 오르는 모란당초넝쿨의 리듬감 넘치는 약동이 작품 전면을 뒤덮고 있다. 역시 3층에 자리한 12세기께의 청자철화서과문호는 수박 모양의 담백한 형상이 단박에 눈길을 채어간다. 아무렇게 슥 그은 듯한 푸른 줄무늬가 정감을 자아낸다.
전시에 나온 매병·장고·대접·접시·합(뚜껑 딸린 그릇) 등의 다양한 철화청자들의 모양과 표면에 나타난 풀과 꽃, 새, 대나무 등의 이미지들은 장인들이 창안한 것은 아니다. 본디 중국의 도자 금속공예품이나 고려 상감청자에서 따온 것들이지만, 생활의 미감에 맞게 활달한 변용의 과정을 드러내면서 독특한 시각적 쾌감을 안겨준다. 후대인 14~15세기 조선 전기 나타나는 분청사기의 대범하게 추상화한 무늬와도 별 차이가 없어 철화청자가 분청사기의 미의식과 연결되어 있음을 짐작하게도 한다. 고고한 기품과 소박한 감각이 어우러진 연적, 유병 등의 작은 철화청자들을 집약해 전시한 3층 구석의 소품 진열장은 놓칠 수 없는 감상의 별미다.
박물관 지하에 차려진 ‘웹툰과 함께 만나는 지옥의 왕들’ 전시장. 주호민 작가의 불화 웹툰과 조선 후기의 지옥불화 시왕도를 나란히 배치해 불화의 세계를 재미있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한 이색 전시다.
철화청자 전시에 못지않은 볼거리가 하나 더 있다. 주호민 작가의 인기 웹툰과 함께 지하 공간에 마련한 ‘시왕도’(十王圖) 불화 모음전 ‘지옥의 왕들’이다. 시왕도는 저승에 간 인간들이 지옥의 왕인 시왕들 앞에서 심판받고 형벌받는 광경을 상상해 그린 조선 후기 불화다. 지하세계를 다스리는 시왕 10명이 망자들을 보살피는 지장보살과 더불어 등장하는데, 이 박물관이 소장한 조선 후기 ‘시왕도’ 명작들을 주 작가의 지옥 순례를 소재로 한 인기 웹툰 <신과 함께>의 내용 패널과 함께 붙여 구경할 수 있게 했다. 저승에서 망자가 첫 심판관으로 만나게 되는 진광대왕과 몸에 못을 박는 그의 형장인 철정지옥을 시작으로 혀를 뽑는 송제대왕의 발설지옥, 다시 태어날 곳을 결정하는 마지막 10번째 오도전륜대왕의 열철성 등 만화와 불화의 이미지들이 여기저기 교차되면서 ‘시왕도’의 요지경을 설명해준다. 일본에서 종종 선보이곤 하는 대중적 틀거지의 불교미술 기획전이 처음 국내에서도 시도됐다는 점을 평가할 만하다. 9월30일까지. 어른 8000원, 초·중·고생 5000원. 일요일은 쉰다. (02)541-3523~5.
글·사진 노형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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