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주희 무용수의 눈에 눈물이 맺히자 일순 무대와 객석엔 팽팽한 긴장감이 흘렀다. 국립현대무용단 제공
250명 관객의 몰입 55분. 26일 서울 예술의전당 자유소극장, 시종 긴장이 계속됐다. 45분께, 일순 음악이 멈추고 조명이 켜졌다. 침묵 1분. 에너지를 소진한 춤꾼의 눈은 그렁그렁했고 점차 붉어졌다. 관객은 이 순간을 오래 잊지 못할 것임에 틀림 없다. 24~26일 공연한 국립현대무용단의 2017년 첫 작품 <혼합>이다. 지난해 6월 프랑스 파리 샤요국립극장 초연 때보다 더 치밀해지고 처절해졌다. 한국과 서양의 춤은 단순 혼합이 아니라 서로의 몸에 깊이 스며들었다.
현대무용 <혼합>은 한국과 서양 춤의 단순 혼합을 넘어 깊게 스며들게 했다. 국립현대무용단 제공
#안팎의 스밈
춤판은 ‘춘앵무’로 시작했다. 봄꾀꼬리를 본딴 춤. 무릎을 굽힐락말락, 버선이 보일락말락. 길게 늘어뜨린 소맷자락(장삼)을 위로 휘감으며 허공에 한 점 콕. 초반 4분간 춘앵무는 앞으로 보여줄 비한국적인 춤, 한국적인 춤과 비한국적인 춤의 섞임에 대한 예고편.
이때 헤드폰을 낀 힙합 춤꾼 등장. 무대를 울리는 유장한 거문고 산조와 힙합 춤꾼한테만 들리는 스피디한 랩은 애시당초 불협화음. 4명의 여성 춤꾼은 거문고에, 1명의 남성 힙합 춤꾼은 랩에 호흡을 맞췄기 때문. 그런데 웬걸! 헤드폰의 내재율과 스피커의 외형율이 희한하게 서로 스며들기 시작했다. 불협화음의 화음. 한국적이지 않은 춤과 한국적인 춤의 섞임은 처음엔 무용수 한 명의 몸에서 일어나, 무용수끼리 섞임으로, 마지막엔 전체 춤판의 섞임으로 번졌다. 안과 밖이 장어처럼 매끄럽게 혼합됐다.
춘앵무의 긴 소맷자락은 현대무용복으로 갈아입은 춤꾼의 손끝에서도 살아났다. 춤꾼은 손끝을 위로 휘감아 허공에 한 점 콕. 가상의 장삼이 허공에 걸렸다. 손목에 토시를 끼워 장삼을 흉내내기도 했다.
#칼의 발견
검무에서 가져온 칼은 현대춤의 ‘신무기’였다. 분리된 손잡이와 칼날 사이에 고리를 끼워 칼을 흔들면 칼날이 휙휙 돌아간다. 춤꾼이 춤을 추면, 춤꾼의 칼도 자유롭게 춤을 췄다. 칼은 철거덕철거덕 소리를 내며 금속성의 비의(秘意)를 번득였다.
지난해 조제 몽탈보 사요국립극장 예술감독이 국립무용단의 <시간의 나이>를 안무할 때, 부채를 사용한 것과 대조를 이룬다. 몽탈보가 붉은 색과 흰 색의 부채로 화려함을 보여줬다면, 안성수 국립현대무용단 예술감독은 무기이며 무구(巫具)인 칼을 가장 효과적인 현대춤 도구로 데뷔시킨 것이다.
춤꾼은 한국적인 소재인 칼을 들었음에도, 발 동작은 서양춤을 보여주는가 하면 장난스럽게 칼을 앞으로 뻗어 펜싱의 찌르기 동작을 보여주기도 했다. 현대무용의 변곡점, 칼의 발견이다.
현대무용 <혼합>에선 검무의 칼을 등장시켜 날렵하면서도 묵직한 효과를 끌어냈다. 국립현대무용단 제공
#그리고 눈물
춤판 막바지 일순 조명이 켜지면, 헉! 헉! 헉! 단말마의 비명. 남성 춤꾼 장경민이 기진맥진 쓰러진다. 에너지를 모두 방출하고 난 몸, 번뇌를 말갛게 게워낸 투명한 영혼. 트랜스 또는 열반 상태다. 방출된 에너지는 바닥에 흥건한 물기로 남았다. 여성 춤꾼 이주희의 눈엔 떨어질듯말듯 물기 한 점. 이주희와 관객은 1분간 팽팽한 눈싸움을 벌였다.
지난해 샤요국립극장 초연 리뷰를 썼던 이지현 춤비평가는 “이번 공연의 특징은 더 처절해진 점”이라고 일별했다. “춤판은 밀물과 썰물처럼 섞였고 치밀했으며 머리가 아니라 감성적으로 접근했다.”
본 공연 뒤엔 다음 공연 예고편 무대인 ‘팝업 스테이지’가 소극장 로비에서 열렸다. 3일간 열린 김설진-김보람-김용걸 안무가의 <쓰리 볼레로> 미리보기는 본공연 못잖은 환호를 받았다. 안성수 체제 국립현대무용단의 출발은 일단 좋다.
손준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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