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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음악·공연·전시

세월호 뭍으로 돌아온 날, ‘윤이상의 봄’도 돌아왔다

등록 2017-04-02 16:20수정 2017-04-02 20:28

[100도씨] 31일 통영국제음악제 개막
첼로 연주자 니콜라스 알트슈테트(지휘자 왼쪽)가 윤이상 <첼로 협주곡>을 연주하고 있다. 통영국제음악재단 제공
첼로 연주자 니콜라스 알트슈테트(지휘자 왼쪽)가 윤이상 <첼로 협주곡>을 연주하고 있다. 통영국제음악재단 제공
손가락으로 줄을 튕기면 가야금이요, 기타처럼 피크로 튕기면 거문고였다. 이게 과연 서양악기 첼로 소리란 말인가. 오케스트라는 똑! 똑! 똑! 목탁 소리를 냈다. 통영국제음악당 콘서트홀 객석은 숨을 죽였다. “감방에서의 지리하고 답답한 긴 하루가 지나가면 취침나팔 소리가 울린다. 슬픈 멜로디의 나팔 소리, 그리고 깊은 정적이 시작된다. 나는 새벽까지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그때 먼 산속 절간에서 울려오는 목탁 소리를 들으며 생각했다. 어느 죄수가 사형될 때 스님이 그 영혼을 인도하기 위하여 염불하며 두드리는 소리라고….”

20세기를 대표하는 현대음악 작곡가 윤이상(1917~95)이 박정희 정권이 조작한 ‘동베를린 사건’으로 갇혔을 때 구상한 <첼로 협주곡>을 설명한 대목이다. 이 곡은 윤이상 탄생 100주년을 맞아 지난 3월31일 ‘2017 통영국제음악제’ 개막공연에서 연주됐다. 통영은 지금 백화제방의 봄. 진달래 허리띠를 두른 미륵산 초입 벚꽃 터널, 남녘 뱃노래 따라 ‘앞으로 나란히 한 유치원생’ 같은 개나리꽃. 모두 새로운 마음으로 ‘윤이상의 봄’을 맞고 있다.

“첼리스트가 윤이상처럼 보였다”

윤이상 음악의 탯줄은 남쪽 바다. 570개 섬들이 점점이 그리움 되어 가슴에 박혔지만, 끝내 다시 돌아오지 못한 고향. “그 잔잔한 바다, 그 푸른 물색, 가끔 파도가 칠 때도 그 파도 소리는 내게 음악으로 들렸고.” 통영 도심 윤이상기념관에 전시된 ‘마지막 육성’이다. 통영오광대, 남해안별신굿, 승전무 등 고향의 풍요로운 전통음악은 현대음악 거장의 자산이었다.

어린 윤이상은 아버지를 따라 밤낚시를 갔다. 물고기 헤엄치는 소리와 어부들의 남도창에 귀를 기울였다. 수면이 그 울림을 멀리까지 보냈다. 바다는 공명판이었고 하늘엔 별이 가득했다. 기념관에 전시된 ‘어린 시절의 음악적 영감’이다.

20세기를 대표하는 현대음악 작곡가 윤이상. 통영국제음악재단 제공
20세기를 대표하는 현대음악 작곡가 윤이상. 통영국제음악재단 제공
개막공연작 <첼로 협주곡>(1976)은 첼리스트 윤이상의 인생이 담긴 곡이다. 첼로 연주자 니콜라스 알트슈테트와 슈테판 숄테스가 지휘하는 통영페스티벌오케스트라가 협연한 이 곡에는 오케스트라에서 첼로 파트가 아예 빠져 있다. 독주 악기와 오케스트라 상호 간에 어우러지는 것을 포기한 유일한 협주곡이다. 솔로로만 등장하는 첼로는 홀로 오케스트라와 맞서 싸운다. ‘상처입은 용’ 윤이상의 삶과 닮았다.

‘윤이상 탄생 100돌’ 통영국제음악제
거문고·목탁소리 낸 ‘첼로 협주곡’
연주자 모습서 윤이상 다시 보는듯

남녘 뱃노래 담긴 동-서 융합 음악
지워진 이름 다시 오롯이 세울 시점
한점 꽃잎 한점 미풍에도 ‘윤이상의 봄’

최우정 작곡가(서울대 음대 교수)는 “실황으로 듣기는 처음인데 ‘연극적인’ 작품 본질이 잘 느껴졌고 특히 독주자가 그것을 잘 표현했다고 본다. 무대 위의 첼리스트는 윤이상 자신인 것 같았다”고 설명했다.

“이 작품은 ‘부재’에 관한, 또는 ‘도달하지 못함’에 관한 작품이라 느꼈습니다. 오케스트라에서 뺀 첼로 파트가 오히려 그 필요성으로 인해 강력히 느껴졌고 ‘라’(A) 음에 거의 이르렀지만 도달하지 못하는 첼로의 마지막 연주에 깊이 공감했습니다. 하지만 도달할 세계인 ‘라’ 음을 오케스트라가 꼭 분명히 소리내야 하는지 작곡가로서 아쉬움을 가지고 있습니다.”

‘라’는 이상적 세계, 도(道)의 세계를 뜻한다. 윤이상은 인간이 표현하는 악기는 ‘라’에 이를 수 없다고 말했다. 도달할 수 없는 벼랑 끝, 그 치명적인 매혹.

베를린발 윤이상 스페셜리스트

4월1일 통영국제음악당을 굽어보는 미륵산 입구. 동백은 붉은 꽃잎 뚝! 뚝! 떨어뜨리고, 산허리 진달래는 붉은 가슴 시리도록 뻐겼다. 개나리 꽃길 좁은 인도를 돌아서면 용화사 초입은 널찍한 벚꽃 터널. ‘봉숫골 꽃나들이’ 축제장엔 말뚝이 춤 따라 통영오광대 놀이판이 왁자하다. 케이블카는 ‘동양의 나폴리’를 한눈에 내려보려는 상춘객을 쉼 없이 실어 날랐다.

벚꽃이 터널을 이룬 통영 미륵산 ‘봉숫골 꽃나들이’ 축제장 가는 길.  손준현 기자
벚꽃이 터널을 이룬 통영 미륵산 ‘봉숫골 꽃나들이’ 축제장 가는 길. 손준현 기자
큰길에서 20여m 거리에 2층짜리 전혁림미술관이 있다. 전혁림은 ‘예향’ 통영을 대표하는 화가로 윤이상과 함께 해방 직후 일제 잔재를 걷어내는 피렌체식 문예부흥운동을 벌였다. 청마 유치환이 초대 회장을 맡은 통영문화협회 간사가 윤이상과 전혁림이었다. 통영은 시인 김춘수, 박경리의 터전이기도 했다.

1일 ‘예향’ 전통을 이어가는 통영국제음악당 콘서트홀에선 ‘윤이상 솔로이스츠 베를린’이 나섰다. 발터볼프강 슈파러 국제윤이상협회 회장이 만든 이 연주단체는 ‘윤이상 스페셜리스트’로, 플루트 연주자 로스비타 슈테게, 오보에 연주자 잉고 고리츠키 등이 수십년간 윤이상의 곡을 연주해오고 있다. 윤이상의 <협주적 단편>, <낙양>, <클라리넷, 바순과 호른을 위한 삼중주>를 연주했다.

연주 뒤 빈 국립음대 출신의 이 단체 바이올린 연주자 박제혁을 만났다. “<협주적 단편>은 현, 목관, 타악기, 피아노가 때론 강하게 때론 부드럽게 대화합니다. 윤이상의 한국전쟁·강제연행 경험이 고통으로 담겼지만, 아름답고 평화로운 하모니를 찾았어요.”

윤이상은 서양현대음악 기법으로 동아시아적 이미지를 표현했고 한국음악의 연주 기법과 서양악기의 결합을 이뤄냈다. 베를린 필하모닉은 창립 100돌 기념작으로 <교향곡 1번>을 위촉했고, 미국 뉴욕 브루클린음악원은 ‘사상 최고 음악가 44인’ 중 20세기를 대표하는 거장으로 그를 꼽았으며, 유네스코는 통영을 ‘창의음악도시’로 지정해 윤이상을 기렸다. 이달 9일까지 열리는 통영국제음악제에선 오페라 <류퉁의 꿈>, <밤이여 나뉘어라>, <클라리넷 협주곡> 등 윤이상 작품을 풍성하게 만날 수 있다.

‘지웠던’ 윤이상 다시 ‘새길 때’

“첼로 협주곡은 작곡가이면서 첼리스트였던 남편의 삶이 다 담긴 곡이에요. 알트슈테트 연주자의 연주도 좋았습니다.” 연주회장에서 만난 윤이상의 부인 이수자(90)씨는 <첼로 협주곡>의 감상 소감을 전했다. 이어 “100회 생신을 맞아 이렇게 한꺼번에 많은 곡이 연주되니 기쁘다”고 했다. 다만, 대편성 관현악곡이 적은 점은 아쉬워했다. 딸 윤정(67)씨는 “어쨌든 100주년을 맞아 좋은 자리가 마련됐다. 예산이 부족해 대편성 곡이 많지 않은 걸 어떡하겠나”고 했다.

통영국제음악당에서 만난 윤이상의 부인 이수자씨와 딸 윤정씨. 손준현 기자
통영국제음악당에서 만난 윤이상의 부인 이수자씨와 딸 윤정씨. 손준현 기자
지난 세월 한국에서는 일부 보수세력의 부추김 속에 ‘윤이상 지우기’가 계속됐다. 윤이상기념관이 위치한 공원은 ‘도천테마파크’가 되고, 윤이상음악제는 통영국제음악제로 부르면서 ‘윤이상’이라는 이름이 점차 사라졌다. 확실한 근거 없이 경제학자 오길남에게 탈북을 권유했다는 주장이 제기되는가 하면, 일부 보수단체는 이를 기화로 유족을 괴롭혔다.

윤정씨는 “그동안 섭섭했다”며 속마음을 숨기지 않았다. 하지만 오는 9월 100회 생일을 앞두고 “베를린 근교 윤이상하우스 재정비 사업이 순조롭게 진행중”이라며 이내 밝은 표정을 지었다.

지난달 31일, 윤이상 탄생 100돌을 맞아 통영국제음악제가 개막한 날, 그날은 ‘윤이상평화재단’을 블랙리스트에 올렸던 박근혜 전 대통령이 구속수감된 날이었고, 박 전 대통령이 끝까지 진실을 막았던 세월호가 1081일 만에 목포항에 귀항한 날이었다. 사필귀정. 세상엔 공짜도 우연도 없다.

통영 도심 윤이상기념관 내부. 손준현 기자
통영 도심 윤이상기념관 내부. 손준현 기자
플로리안 리임 통영국제음악재단 대표는 프로그램북을 통해 이렇게 밝혔다. “최근 한국의 정치적 변화는 윤이상이 일평생 추구했던 이해와 관용, 그리고 평화에 대한 열망과 다를 바 없습니다. 그의 음악 속에 표현된 사고와 감정이 여러분에게 들려지길 바라며, 다음 세대에서도 굳건하기를 바랍니다.”

자기 땅에서 유배당한 20세기 대표 작곡가 윤이상. 그 이름을 국외에서처럼 국내에서도 다시 오롯이 세워야 할 시점. 지금이 바로 그때다. 남녘 바다 통영의 4월. 한 점 꽃잎, 한 점 미풍까지도 쉴 새 없이 ‘윤이상의 봄’을 실어 나르고 있다.

통영/손준현 기자 dus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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