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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음악·공연·전시

그러나 시작은 이명박 정권부터였다

등록 2017-05-18 08:00수정 2017-05-18 08:21

‘블랙리스트’ 연극연출가 박근형
<모든 군인은 불쌍하다> 다시 막 올려
“나는 천천히 알려주겠다는 주의자
결국 세상도 천천히 변화할 것”
연극 <모든 군인은 불쌍하다>. 남산예술센터 제공
연극 <모든 군인은 불쌍하다>. 남산예술센터 제공
모든 일의 발단에 개구리가 있었다. 2013년 국립극단은 연극 <개구리>를 제작했다. 박정희?박근혜 전 대통령을 풍자한 이 작품으로 인해 연출가 박근형은 박근혜 정권의 눈 밖에 났다. 이후 그에 대한 탄압이 암암리에 진행되면서 그의 이름이 지워지기 시작했다. 그와, 그가 이끄는 극단 골목길은 정부지원금 신청에서 번번이 탈락했다. 박준우 전 청와대 정무수석의 업무수첩 속 “연극 <개구리>를 용서할 수 없다”는 김기춘 전 대통령 비서실장의 발언은 이를 증거한다. 여기까지는 법정증언을 통해 드러난 사실이다. 연극계에서 ‘개구리’는 검열의 동의어로 통한다.

그런데 이 부분에서 박근형은 다른 추측을 던진다. 검열은 이미 이명박 정권부터 작동했다는 것이다. 2009년 6월, 이명박 정부 정책에 반발한 시민들의 시국선언이 이어졌다. 연극인들의 연극인선언도 있었다. 그 중심에 있던 이가 박근형이다. “그때도 이미 늦은 시기였어요. 다른 곳에서는 다 시국선언을 발표했는데, 연극인만 하지 않았어요. 쪽팔리잖아요. 그런데 돈 걷느라 시간을 더 허비하면 어떡해요. 급한 대로 골목길 돈으로 연극인선언 광고를 냈죠.” 그 일 후, 연극인선언을 주도한 소장 연출가들의 살생부가 생겼다는 흉흉한 소문이 대학로에 나돌았다. 실제로 그를 비롯해 몇몇 연출가의 이름이 각종 심사에서 지워지기 시작했다.

박근형 연극연출가가 16일 오후 서울 남산예술센터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박종식 기자 anaki@hani.co.kr
박근형 연극연출가가 16일 오후 서울 남산예술센터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박종식 기자 anaki@hani.co.kr
그의 이름이 다시 등장한 건 2015년 9월 국정감사장에서였다. 이에 앞서 박근형은 2014년 한국문화예술위원회(문예위)가 주관하는 지원금 사업에 신작 <모든 군인은 불쌍하다>를 신청했다. 작품은 높은 평가를 받으며 지원 대상으로 선정되었지만, 문예위는 심사위원들에게 해당 작품을 배제할 것을 종용하였다. 이에 심사위원들이 반발하고, 다급해진 문예위 직원들이 박근형 연출을 직접 찾아가 읍소에 가까운 협박을 하였다. 그가 지원을 포기하지 않을 시 지원사업 자체를 폐지할 수 있다는 내용이었다. 결국 박근형은 손을 들었다. 그리고 이 일은 2015년 9월 국정감사장에서 더불어민주당 도종환 의원의 폭로로 세상에 알려진다.

문제적 작가의 문제적 작품 <모든 군인은 불쌍하다>가 14일 남산예술센터에서 막을 올렸다. 그는 근현대사의 굵직한 사건이 일어났던 순간을 배경으로, 이름 하나 겨우 남기고 산화한 무명용사들을 주인공으로 내세웠다. 1945년 일제강점기 가미카제 자살특공대에 자원입대했던 조선인 청년. 2004년 이라크 전쟁 당시 이라크 무장단체에 참수당한 식품회사 직원. 2010년 백령도 해상에 침몰했던 천안함에서 근무하던 수병들. 그리고 지금의 탈영병. 작품 속 그 누구도 미화되거나 폄하되지 않는다는 건, 박근형의 모든 작품이 품고 있는 미덕이다. 그는 조선인 청년에게도, 탈영병에게도, 심지어 이라크 무장단체에도 존재의 이유를 심어준다. 그리고 탈영병의 “사는 게 전쟁이고, 우린 모두 군인”이라는 대사는 작품을 ‘모든 시민은 불쌍하다’로 확장시킨다. 그들을 통해 박근형이 보여주려 했던 것은 무엇일까?

박근형 연극연출가가 16일 오후 서울 남산예술센터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박종식 기자 anaki@hani.co.kr
박근형 연극연출가가 16일 오후 서울 남산예술센터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박종식 기자 anaki@hani.co.kr
“네 시기를 정한 이유는 딱히 없어요. 단지 그 사람들의 이야기를 엮어서 궁극적으로는 주권을 보여주고 싶었어요. 대한민국 국민의 주권. 해방 이후 이 나라의 주권이 도대체 어디에 있는가, 그런 이야기를 해보고 싶었어요.”

지난해 3월 초연 당시 작품은 116%의 객석점유율을 기록했다. 같은 해 10월 ‘페스티벌/도쿄’의 공식초청작으로 일본 관객을 만난 후, 이번이 세 번째 공연이다. 배우 두 명의 교체가 가장 큰 변화. 그 외 일부 대사가 수정되었으나, 작품의 축에는 큰 변화가 없다. 재연이라 큰 걱정은 없지만, 그럼에도 배우와 관련해 작은 근심은 있다고 그는 말한다.

“바뀐 두 명이 아니라, 바뀌지 않은 스무 명이 오히려 더 걱정이에요. 한 번 해본 연기라 더 유연하게, 더 세련되게, 더 잘할 수도 있을 거거든요. 저와 작업한 배우들은 다 근사한 배우들이라 아마 더, 더 잘할 거예요. 하지만 제가 바라는 건 그런 게 아니에요. 연극은 싱싱해야 하잖아요. 연극에서 제일 중요한 게 싱싱함이죠. 잘하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풋풋함이 중요해요. 풋풋함이 없는 연극은 철지난 나물 같은 거죠. 싱싱함이 없으면 연극 끝난 거예요.”

우연히도 작품이 공연된 세 시기는 격변기였다. 박근혜 정권의 서슬이 퍼렜던 초연, 비선실세 최순실의 존재가 막 알려지기 시작할 즈음의 일본 공연. 그리고 문재인 대통령 시대가 열린 지금. 엄혹했던 시절, 검열 사태의 한복판에서 가장 많은, 그리고 직접적인 탄압을 받았던 그의 감회는 어떨까?

“지난해 연말에 재연을 확정할 때도 이렇게 세상이 바뀔 줄 몰랐어요. 해방 후 70년이 지났는데, 사람들이 다 이상해졌어요. 지금부터라도 하나씩 고쳐야 해요. 그래서 전 ‘적폐청산’이라는 표현보다 청소라는 말을 쓰고 싶어요. 후진 집안이지만 먼지도 털고 마루도 닦고 마당도 쓸면서 그냥 오순도순 가족이 사는 집을 만들었으면 좋겠어요. 젊은 시절 전 노동자도 학생도 아니고 어중간한, 길거리 방황하는 사람이었어요. 연극을 했어요. 그때 트로츠키에 공감했어요. 그러면서 세상에 눈을 떴어요. 세상을 천천히 변화시키겠다고 약속했어요. 저는 천천히 알려주겠다는 주의자예요. 결국 세상도 그렇게 될 거라고 믿어요.”

연극 <모든 군인은 불쌍하다>. 남산예술센터 제공
연극 <모든 군인은 불쌍하다>. 남산예술센터 제공
점진적 개량주의자 박근형의 연극 <모든 군인은 불쌍하다>는 남산예술센터에서 6월4일 막을 내린 후, 자리를 옮겨 인천문화예술회관(6월16~17일), 성남아트센터(6월22~24일)에서 공연된다.

김일송/공연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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