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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음악·공연·전시

이 땅을 울며 어루만져 그린 노장의 그림

등록 2017-05-30 08:00수정 2017-05-30 09:12

리얼리즘 풍경화 대가 손장섭 작가 회고전
학창시절부터 닦은 탄탄한 기본기와 색감 지속
80년대 현실과 발언 동인 역사화로 주목
신목, 고목, 산악 풍경 등으로 자연에 녹은 민중성 탐색
손장섭 작가가 2012년 그린 아크릴 그림 <울릉도 향나무>.
손장섭 작가가 2012년 그린 아크릴 그림 <울릉도 향나무>.
올해로 76살. 그는 철저한 리얼리스트다. 백내장을 앓아 눈이 가물가물해지는 노령의 한계 속에서 화가는 더 절절하게 산하와 나무들의 진경을 꿰뚫어보려고 혼신의 힘을 다한다. 또래 다른 작가들이라면 모호한 추상의 선과 색감 속으로 침잠할 만도 하건만, 여전히 삶 곁자리 고목이나 노송의 둥치와 앙상한 가지 사이를 붓으로 훑는다. 꺼끌꺼끌한 필선 사이로 흰색과 회색, 갈색, 푸른색 물감을 휙 긋거나 두툼하게 겹쳐 올려 선연하고도 신비스러운 거목들 풍경을 화폭에 일군다.

지금 서울 소격동 학고재화랑에 마련된 손장섭 작가의 16번째 개인전 ‘손장섭: 역사, 그 물질적 흔적으로서의 회화’는 국내 현대 화단에서 형식과 내용이 가장 탁월한 조화를 이뤘다고 평가받는 풍경회화들의 모음이라 할 수 있다. 서라벌고 시절부터 비롯된 화가 인생 50여년을 진중한 사실주의자로 초지일관해온 작가는 격변의 한국 현대사 현장을 풀어낸 1980년대의 대작 역사화와 1990~2000년대 신목, 고목 등을 담은 풍경화 30여점을 본관·별관에 나눠 내걸었다.

한국 현대미술사에서 리얼리즘 풍경화의 획을 그은 손 작가의 작업은 두 흐름으로 갈래지어진다. 80년대 초 현실 비판 미술가들의 동인인 ‘현실과 발언’ 참여 시기의 역사화와, 90년대 이후 본격화한 이 땅의 산과 바다, 나무들을 소재로 한 일련의 풍경 연작들이다. 두 흐름은 사실 하나의 맥락 속에서 연결된다고 볼 수 있다. 전남 완도 고금도에서 태어나 유년기를 보낸 작가는 청정 해역인 고향 풍경을 지켜보며 풍경화가로서의 소양을 닦았다. 여기에, 서라벌고 진학 뒤 체험했던 4월 혁명의 강렬한 기억이 겹치면서 ‘역사 속에서 자각한 인간’이란 화두를 평생 품게 된다. 이 화두가 데뷔작인 60년 <4월의 함성>을 시작으로 80년대 <조선총독부>, <역사의 창> 연작과 같은 기념비적 역사화의 경지를 이끌어낸 셈이다. 아울러 이런 체험은 90년대 이후 그가 자연스럽게 민중의 삶이 깃든 이 땅 산악과 고목, 신목을 답사하며 사생하는 쪽으로 더욱 확장되었고, 전국 각지의 신목 연작과 금강산·설악산 그림 등으로 화풍이 전화하는 계기를 만들어냈다. 초등학교 시절부터 단련해온 유난한 색채 감각이 작업 경로들을 더욱 명징하게 해주었다. 그 색채감이란 선연하면서도 아른해지는, 구체성과 신비감을 함께 지닌 회색과 흰색의 명도 낮은 화면이다.

손장섭 작가가 고교 시절이던 1960년 4월 혁명 당시 군중을 보고 그렸다는 수채화 소품 <4월의 함성>. 이마에 띠를 두르고 결기에 찬 청년과 시민들의 모습이 담겼다. 4월 혁명 현장을 사생해 그린, 몇 안 되는 희귀작품이다.
손장섭 작가가 고교 시절이던 1960년 4월 혁명 당시 군중을 보고 그렸다는 수채화 소품 <4월의 함성>. 이마에 띠를 두르고 결기에 찬 청년과 시민들의 모습이 담겼다. 4월 혁명 현장을 사생해 그린, 몇 안 되는 희귀작품이다.
전시는 작가의 화력을 짚어볼 수 있는 시기별 작품들을 간추려 놓았다. 눈을 사로잡는 건 본관 일부와 별관 지하 신목 신작들이다. 도동시가지가 내려다보이는 절벽에서 힘차게 용틀임하며 비상하는 듯한 <울릉도 향나무>, 앙상한 가지 사이로 화염 같은 대기감을 흰빛 색감으로 내뿜는 <강화도 은행나무>, 억세고 단단한 몸체와 그물 같은 잔가지 아래 평범한 일상 풍경이 펼쳐지는 <인천 남동구 은행나무> 등은 필력과 작가가 지향하는 창작의지가 하나가 되어 회화적 감동의 진수를 느끼게 한다. 숱한 세월의 풍상에도 그 자리에 변함없는 의지로 서 있으며 사람들의 삶을 껴안고 그들에게 원기를 주는 나무의 존재감이 장엄하게 전해져온다. 2000년대 이후 북녘의 내금강·외금강 사생 대작들은 18세기 화인 겸재 정선의 금강산 화첩에서 느낄 수 있는 압축과 생략, 골법용필의 필력을 독특한 색바림과 구도를 통해 새롭게 재해석해 놓았다. 전통회화의 준법처럼 퍼런 색덩이를 산세 속에 마구 부려넣은 <상팔담>은 가히 압권이다. 성완경 평론가가 91년 그의 전시 도록을 쓸 때 짚어냈듯이, 이 땅을 사랑의 눈길과 손길로 ‘쓰다듬고’ ‘울면서 어루만지면서’ 그렸기에 가능한 그림들이 아닐 수 없다. 6월18일까지. (02)720-1524~6.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도판 학고재화랑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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