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장섭 작가가 2012년 그린 아크릴 그림 <울릉도 향나무>.
올해로 76살. 그는 철저한 리얼리스트다. 백내장을 앓아 눈이 가물가물해지는 노령의 한계 속에서 화가는 더 절절하게 산하와 나무들의 진경을 꿰뚫어보려고 혼신의 힘을 다한다. 또래 다른 작가들이라면 모호한 추상의 선과 색감 속으로 침잠할 만도 하건만, 여전히 삶 곁자리 고목이나 노송의 둥치와 앙상한 가지 사이를 붓으로 훑는다. 꺼끌꺼끌한 필선 사이로 흰색과 회색, 갈색, 푸른색 물감을 휙 긋거나 두툼하게 겹쳐 올려 선연하고도 신비스러운 거목들 풍경을 화폭에 일군다.
지금 서울 소격동 학고재화랑에 마련된 손장섭 작가의 16번째 개인전 ‘손장섭: 역사, 그 물질적 흔적으로서의 회화’는 국내 현대 화단에서 형식과 내용이 가장 탁월한 조화를 이뤘다고 평가받는 풍경회화들의 모음이라 할 수 있다. 서라벌고 시절부터 비롯된 화가 인생 50여년을 진중한 사실주의자로 초지일관해온 작가는 격변의 한국 현대사 현장을 풀어낸 1980년대의 대작 역사화와 1990~2000년대 신목, 고목 등을 담은 풍경화 30여점을 본관·별관에 나눠 내걸었다.
한국 현대미술사에서 리얼리즘 풍경화의 획을 그은 손 작가의 작업은 두 흐름으로 갈래지어진다. 80년대 초 현실 비판 미술가들의 동인인 ‘현실과 발언’ 참여 시기의 역사화와, 90년대 이후 본격화한 이 땅의 산과 바다, 나무들을 소재로 한 일련의 풍경 연작들이다. 두 흐름은 사실 하나의 맥락 속에서 연결된다고 볼 수 있다. 전남 완도 고금도에서 태어나 유년기를 보낸 작가는 청정 해역인 고향 풍경을 지켜보며 풍경화가로서의 소양을 닦았다. 여기에, 서라벌고 진학 뒤 체험했던 4월 혁명의 강렬한 기억이 겹치면서 ‘역사 속에서 자각한 인간’이란 화두를 평생 품게 된다. 이 화두가 데뷔작인 60년 <4월의 함성>을 시작으로 80년대 <조선총독부>, <역사의 창> 연작과 같은 기념비적 역사화의 경지를 이끌어낸 셈이다. 아울러 이런 체험은 90년대 이후 그가 자연스럽게 민중의 삶이 깃든 이 땅 산악과 고목, 신목을 답사하며 사생하는 쪽으로 더욱 확장되었고, 전국 각지의 신목 연작과 금강산·설악산 그림 등으로 화풍이 전화하는 계기를 만들어냈다. 초등학교 시절부터 단련해온 유난한 색채 감각이 작업 경로들을 더욱 명징하게 해주었다. 그 색채감이란 선연하면서도 아른해지는, 구체성과 신비감을 함께 지닌 회색과 흰색의 명도 낮은 화면이다.
손장섭 작가가 고교 시절이던 1960년 4월 혁명 당시 군중을 보고 그렸다는 수채화 소품 <4월의 함성>. 이마에 띠를 두르고 결기에 찬 청년과 시민들의 모습이 담겼다. 4월 혁명 현장을 사생해 그린, 몇 안 되는 희귀작품이다.
전시는 작가의 화력을 짚어볼 수 있는 시기별 작품들을 간추려 놓았다. 눈을 사로잡는 건 본관 일부와 별관 지하 신목 신작들이다. 도동시가지가 내려다보이는 절벽에서 힘차게 용틀임하며 비상하는 듯한 <울릉도 향나무>, 앙상한 가지 사이로 화염 같은 대기감을 흰빛 색감으로 내뿜는 <강화도 은행나무>, 억세고 단단한 몸체와 그물 같은 잔가지 아래 평범한 일상 풍경이 펼쳐지는 <인천 남동구 은행나무> 등은 필력과 작가가 지향하는 창작의지가 하나가 되어 회화적 감동의 진수를 느끼게 한다. 숱한 세월의 풍상에도 그 자리에 변함없는 의지로 서 있으며 사람들의 삶을 껴안고 그들에게 원기를 주는 나무의 존재감이 장엄하게 전해져온다. 2000년대 이후 북녘의 내금강·외금강 사생 대작들은 18세기 화인 겸재 정선의 금강산 화첩에서 느낄 수 있는 압축과 생략, 골법용필의 필력을 독특한 색바림과 구도를 통해 새롭게 재해석해 놓았다. 전통회화의 준법처럼 퍼런 색덩이를 산세 속에 마구 부려넣은 <상팔담>은 가히 압권이다. 성완경 평론가가 91년 그의 전시 도록을 쓸 때 짚어냈듯이, 이 땅을 사랑의 눈길과 손길로 ‘쓰다듬고’ ‘울면서 어루만지면서’ 그렸기에 가능한 그림들이 아닐 수 없다. 6월18일까지. (02)720-1524~6. 노형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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