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짬】 32년 전 사진으로 첫 개인전 장명확 작가
1985년 9월1일 24살 청년이 표준렌즈가 달린 카메라 두 대를 메고 대구에서 출발했다. 그는 고령, 남원, 광주, 화순, 여수, 마산, 부산, 밀양을 거쳐 다시 대구에 도착하기 41일 동안 하루 30㎞씩 총 1200㎞를 오로지 발로 걸어서 다니며 이 땅과 사람들을 찍었다. 그는 스스로 ‘사진쟁이’라고 부르는 장명확(56)씨다.
그는 지난달 30일 32년간 묵은 사진들을 묶어 사진집 <달빛 아리랑>(도서출판 시간여행 펴냄)을 냈다. 출간에 맞춰 서울 인사동 갤러리나우에서 같은 제목의 사진전도 열었다. 지난 7일 전시장에서 그를 만났다.
청소년기 두번의 ‘자살’ 목격 ‘충격’
‘삶과 죽음’ 화두 삼아 사진기행 나서
1985년 제대 뒤 41일간 나홀로 걸어
“다리밑 비박에 간첩 오인받기도” 친구 권유로 묵은 필름 5천장 꺼내
사진집 펴내고 30여점 골라 전시 궁금했다. 32년 전 도대체 그는 왜 걸었을까? 장씨는 어린 시절 두번의 죽음을 목도하면서 삶과 죽음에 대해 고민하게 되었다고 했다. 초등학교 5학년 때 나이 차이가 별로 나지 않아 누이처럼 친하게 지냈던 고등학생 막내 고모가 자살해서 큰 충격을 받았다. 또 한번은 고2 수학여행 때였다. 설악산 비룡폭포 앞에서 점심때까지 자유시간을 얻은 빡빡머리 학생들 사이에서 비명이 터져나왔다. 어떤 청년이 폭포 꼭대기로 올라가더니 뛰어내린 것이다. “그런데 그 순간 내 손엔 올림푸스 하프사이즈 카메라가 있었고 투신 장면 3컷을 찍었다. 수학여행은 엉망이 되었다. 2주일쯤 지나서 그때 찍은 사진 3장을 인화해서 학교에 들고 갔다. 또 한번 난리가 났고 난 ‘죽일 놈’이 되었다. 다들 충격에서 벗어나려던 참이었는데 사진으로 다시 한번 기억을 상기시킨 셈이었다. 사실 나도 심하게 놀란 사람이었지만 내가 찍은 사진이 궁금하기도 하고 그랬던 것이다. 어쨌든 어린 마음에도 ‘사진이 찍혀 나온다는 것은 사실이 있었다는 증거가 된다’는 것이 놀라웠다. 무섭기도 했지만 그때 사진이란 게 각인이 되었을 것이다. 대학 1학년 때 ‘수미산’이란 화두를 받았다. 화두란 것은 말의 의미로 풀 수 있는 것이 아니었고 마음으로 풀었어야 했는데…. 젊은 시절엔 머리가 터지도록 고민만 했다. 인간은 왜 영원할 수 없는가? 나는 어떻게 되는가? 그러다가 입대했고 제대 후 도보여행을 결심하게 된 것이다. 뭔가 답을 찾고 싶었고 또 한편으로 이 땅의 사람들을 만나고도 싶었다”고 답했다. 하지만 혼자서 41일을 계속 걷는 일이 쉽지는 않았다. “물론 육체적으로도 힘이 들었지만 더 심한 것은 외로움이었다. 하루에 열 마디로 못하는 날도 있었다. 태풍이 불거나 비가 내리는 날이면 시골길에 사람 하나 없었다. 그때만 해도 허름한 옷차림에 카메라를 들었으니 간첩으로 오인하여 신고를 하는 일이 잦았다. 미리 준비한 게 있었다. 아는 경찰관에게 사진 도보여행의 취지를 말했더니 선뜻 이해를 하고선 남부경찰서장의 직인이 들어간 종이 신분증을 만들어주더라. 코팅해서 주머니에 넣었다. ‘이 사람은 정직한 대한민국 사람으로 신분을 보장합니다…’라는 내용이었다. 민가를 만나지 못할 땐 다리 밑이나 개울가에서 라면 하나 끓여 먹고 텐트 치고 잤다. 운 좋게 이장집을 찾을 수 있는 날이면 외양간이나 동네 빈집에서 눈을 붙이기도 했다. 어느날엔 빈집에서 자는데 새벽에 누군가 낫을 들고 나타나 ‘마귀를 죽이러 왔다’고 난리를 쳐서 혼비백산한 적도 있었다.” 사진집에 등장하는 80년대 말 남도의 사람들은 애나 어른 할 것 없이 순박한 표정들이다. “저는 간첩도 아니고 건강한 대한민국 사람입니다. 대한민국 땅을 알고 싶어서 걷습니다. 사진을 찍게 해주십시오”라고 말을 붙이는 장씨의 카메라 앞에서 시골 촌노들은 웃음을 터뜨려주곤 했다. 그나저나 화두에 대한 답을 찾았을까? 장씨는 말했다. “답은 없었다. 저 멀리 대구가 보이던 41일째 마지막날 마침 가랑비가 내리면서 속절없이 흐르는 눈물을 씻어주었지만 답답했던 마음이 씻겨 내려가진 않았다. 결국 마지막은 나였다. 내가 내 속에 갇혀 있었다. 나도 참 바보였다. 내가 이걸 알기 위해 스스로 고행을 했구나.” 복학해 대학을 마친 장씨는 1988년부터 여러 매체에서 사진기자로 일했고 그사이에 사진 공부가 부족하다는 생각에 홍익대 산업미술대학원까지 마쳤다. 그런데 또 한번 삶과 죽음의 문제와 충돌해야 했다. 결혼 3년 만에 아들과 딸을 남긴 채 부인이 사고로 먼저 세상을 떠나버린 것이다. 큰애가 3살, 작은애는 젖먹이였다. “또 한번 내 인생이 뒤집어졌다.” 생활고도 겹쳤다. 장씨는 “2000년대 초반, 애들 키우느라 일을 제대로 할 수 없던 무렵 불교 쪽으로 발길이 가더라. 향내음과 풍경 소리가 나를 끌었다. 불교방송에서 나오는 <불교와 문화> 잡지의 사진 일을 하게 되었고 지금까지 10년 넘게 사찰을 찍고 있다. 몇 년 전 기준으로 한국엔 1025개의 전통사찰이 있는데 그 정도는 다 가봤다. 30년 넘은 일주문은 한 200군데 찍었고 마애불상군 사진도 오랫동안 찍고 있다”고 했다. 전시는 어떻게 하게 되었을까? 올해 초 ‘시몽’이란 별명을 가진 친구가 던진 한마디 덕분이었다. “너 30년 전에 걸으면서 찍은 사진이 있다고 했지? 그 사진이 살아날 것 같아. 너의 사진에는 살려고 하는 숙주가 있다. 니가 찍고 창고에 처박아둔 사진이지만 세상에 나오고 싶어할 것이야.” 친구는 자신이 운영하는 카페 갤러리에서 사진전을 하라고 권했다. 장씨는 친구의 ‘숙주론’에 머리칼이 곤두서면서 마음이 동했고 30년 묵은 필름 5천컷에서 고르고 골라 30점으로 전시를 준비했다. 그런데 전시가 임박할 무렵 일이 틀어져서 친구의 카페 갤러리에서 전시를 열 수가 없게 되었다. 다행히 지인들의 주선으로 불교문화재단, 출판사 은행나무와 시간여행의 도움을 받아 그의 생애 첫 개인전이 열렸다. 글·사진 곽윤섭 선임기자 kwak1027@hani.co.kr
사진작가 장명확씨가 <달빛 아리랑> 전시장에서 32년 전 홀로 걸으며 찍었던 흑백 사진들을 한장 한장 소개하고 있다.
‘삶과 죽음’ 화두 삼아 사진기행 나서
1985년 제대 뒤 41일간 나홀로 걸어
“다리밑 비박에 간첩 오인받기도” 친구 권유로 묵은 필름 5천장 꺼내
사진집 펴내고 30여점 골라 전시 궁금했다. 32년 전 도대체 그는 왜 걸었을까? 장씨는 어린 시절 두번의 죽음을 목도하면서 삶과 죽음에 대해 고민하게 되었다고 했다. 초등학교 5학년 때 나이 차이가 별로 나지 않아 누이처럼 친하게 지냈던 고등학생 막내 고모가 자살해서 큰 충격을 받았다. 또 한번은 고2 수학여행 때였다. 설악산 비룡폭포 앞에서 점심때까지 자유시간을 얻은 빡빡머리 학생들 사이에서 비명이 터져나왔다. 어떤 청년이 폭포 꼭대기로 올라가더니 뛰어내린 것이다. “그런데 그 순간 내 손엔 올림푸스 하프사이즈 카메라가 있었고 투신 장면 3컷을 찍었다. 수학여행은 엉망이 되었다. 2주일쯤 지나서 그때 찍은 사진 3장을 인화해서 학교에 들고 갔다. 또 한번 난리가 났고 난 ‘죽일 놈’이 되었다. 다들 충격에서 벗어나려던 참이었는데 사진으로 다시 한번 기억을 상기시킨 셈이었다. 사실 나도 심하게 놀란 사람이었지만 내가 찍은 사진이 궁금하기도 하고 그랬던 것이다. 어쨌든 어린 마음에도 ‘사진이 찍혀 나온다는 것은 사실이 있었다는 증거가 된다’는 것이 놀라웠다. 무섭기도 했지만 그때 사진이란 게 각인이 되었을 것이다. 대학 1학년 때 ‘수미산’이란 화두를 받았다. 화두란 것은 말의 의미로 풀 수 있는 것이 아니었고 마음으로 풀었어야 했는데…. 젊은 시절엔 머리가 터지도록 고민만 했다. 인간은 왜 영원할 수 없는가? 나는 어떻게 되는가? 그러다가 입대했고 제대 후 도보여행을 결심하게 된 것이다. 뭔가 답을 찾고 싶었고 또 한편으로 이 땅의 사람들을 만나고도 싶었다”고 답했다. 하지만 혼자서 41일을 계속 걷는 일이 쉽지는 않았다. “물론 육체적으로도 힘이 들었지만 더 심한 것은 외로움이었다. 하루에 열 마디로 못하는 날도 있었다. 태풍이 불거나 비가 내리는 날이면 시골길에 사람 하나 없었다. 그때만 해도 허름한 옷차림에 카메라를 들었으니 간첩으로 오인하여 신고를 하는 일이 잦았다. 미리 준비한 게 있었다. 아는 경찰관에게 사진 도보여행의 취지를 말했더니 선뜻 이해를 하고선 남부경찰서장의 직인이 들어간 종이 신분증을 만들어주더라. 코팅해서 주머니에 넣었다. ‘이 사람은 정직한 대한민국 사람으로 신분을 보장합니다…’라는 내용이었다. 민가를 만나지 못할 땐 다리 밑이나 개울가에서 라면 하나 끓여 먹고 텐트 치고 잤다. 운 좋게 이장집을 찾을 수 있는 날이면 외양간이나 동네 빈집에서 눈을 붙이기도 했다. 어느날엔 빈집에서 자는데 새벽에 누군가 낫을 들고 나타나 ‘마귀를 죽이러 왔다’고 난리를 쳐서 혼비백산한 적도 있었다.” 사진집에 등장하는 80년대 말 남도의 사람들은 애나 어른 할 것 없이 순박한 표정들이다. “저는 간첩도 아니고 건강한 대한민국 사람입니다. 대한민국 땅을 알고 싶어서 걷습니다. 사진을 찍게 해주십시오”라고 말을 붙이는 장씨의 카메라 앞에서 시골 촌노들은 웃음을 터뜨려주곤 했다. 그나저나 화두에 대한 답을 찾았을까? 장씨는 말했다. “답은 없었다. 저 멀리 대구가 보이던 41일째 마지막날 마침 가랑비가 내리면서 속절없이 흐르는 눈물을 씻어주었지만 답답했던 마음이 씻겨 내려가진 않았다. 결국 마지막은 나였다. 내가 내 속에 갇혀 있었다. 나도 참 바보였다. 내가 이걸 알기 위해 스스로 고행을 했구나.” 복학해 대학을 마친 장씨는 1988년부터 여러 매체에서 사진기자로 일했고 그사이에 사진 공부가 부족하다는 생각에 홍익대 산업미술대학원까지 마쳤다. 그런데 또 한번 삶과 죽음의 문제와 충돌해야 했다. 결혼 3년 만에 아들과 딸을 남긴 채 부인이 사고로 먼저 세상을 떠나버린 것이다. 큰애가 3살, 작은애는 젖먹이였다. “또 한번 내 인생이 뒤집어졌다.” 생활고도 겹쳤다. 장씨는 “2000년대 초반, 애들 키우느라 일을 제대로 할 수 없던 무렵 불교 쪽으로 발길이 가더라. 향내음과 풍경 소리가 나를 끌었다. 불교방송에서 나오는 <불교와 문화> 잡지의 사진 일을 하게 되었고 지금까지 10년 넘게 사찰을 찍고 있다. 몇 년 전 기준으로 한국엔 1025개의 전통사찰이 있는데 그 정도는 다 가봤다. 30년 넘은 일주문은 한 200군데 찍었고 마애불상군 사진도 오랫동안 찍고 있다”고 했다. 전시는 어떻게 하게 되었을까? 올해 초 ‘시몽’이란 별명을 가진 친구가 던진 한마디 덕분이었다. “너 30년 전에 걸으면서 찍은 사진이 있다고 했지? 그 사진이 살아날 것 같아. 너의 사진에는 살려고 하는 숙주가 있다. 니가 찍고 창고에 처박아둔 사진이지만 세상에 나오고 싶어할 것이야.” 친구는 자신이 운영하는 카페 갤러리에서 사진전을 하라고 권했다. 장씨는 친구의 ‘숙주론’에 머리칼이 곤두서면서 마음이 동했고 30년 묵은 필름 5천컷에서 고르고 골라 30점으로 전시를 준비했다. 그런데 전시가 임박할 무렵 일이 틀어져서 친구의 카페 갤러리에서 전시를 열 수가 없게 되었다. 다행히 지인들의 주선으로 불교문화재단, 출판사 은행나무와 시간여행의 도움을 받아 그의 생애 첫 개인전이 열렸다. 글·사진 곽윤섭 선임기자 kwak1027@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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