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디츠코가 1988년 미국 뉴욕의 노숙자들을 위해 처음 만든 노숙자 수레. 노숙자들이 자신들의 짐과 세간을 싣고 이동하거나 쉴 수 있도록 마련된 장치다.
연못 둘레 벽에 낡은 자물쇠를 잡고 꾸물거리는 두 개의 손이 비친다. 손의 주인공인 노인이 담담한 어조로 독백을 시작한다. “아버지가 타던 자전거 자물쇠였습니다. 형체를 알 수 없는 주검 더미 속에서 이 자물쇠와 금이빨로 아버지 주검을 알 수 있었어요. 그렇게 신원을 파악한 뒤 유해를 가져와 장례를 치렀지요.”
이 영상의 무대는 1945년 세계 최초로 원자폭탄이 투하돼 수십만명이 숨진 일본 히로시마의 저 유명한 원폭돔 연못이다. 폴란드 출신의 미디어예술가이자 사회적 디자이너인 크지슈토프 보디츠코(74)는 1999년 8월6일 히로시마의 평화기념식에 맞춰 당시 피폭 피해자들의 묻혀 있던 증언들을 오직 그들의 손 형상만이 연못가에 스멀거리는 영상 프로젝션과 함께 들려주었다. 손 영상과 육성증언, 연못 주변의 원폭돔 건물, 산책객의 모습만 보여주지만, 그 어떤 다큐보다도 통절하고 쓰리게 당시의 참상이 전해져온다.
지금 서울 소격동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지하 5전시장에 마련된 보디츠코의 첫 한국 초대전에서는 우리 미술판에서 ‘감히’ 상상하지 못했던 공공예술의 신기원을 만나게 된다. 이탈리아 사상가 조르조 아감벤이 벌거벗은 자들, 이른바 ‘호모 사케르’라고 명명했던, 사회에서 배제된 자들의 절박한 육성이 물컹한 몸 영상과 함께 물화되어 귓전을 때리는 경험이다.
극장 얼개의 공간에 나온 보디츠코의 신작 <나의 소원>. 백범 김구의 모조 좌상에 자신들의 소망을 말하는 한국의 소외계층 사람들과 보통 시민의 얼굴, 몸의 영상이 프로젝션 매핑 기법으로 겹쳐져 관객과 실제로 대담하는 듯한 생동감을 준다. 사진은 세월호 침몰 당시 희생된 학생의 어머니가 안전한 나라를 호소하는 장면이다.
<히로시마 프로젝션>을 비롯해 작가가 90년대부터 최근까지 전세계 여러 나라의 공공장소, 기념비, 동상 등에 투사한 ‘호모 사케르’들의 묻혔던 말들은 5전시장 좌우 측면에서 투사된다. 멕시코의 미국 접경도시 티후아나의 문화관 건물에선 가정폭력, 성폭력에 노출된 여성들의 울먹이는 육성이 코를 벌름거리고 눈을 번득이는 얼굴 영상 속에 울려나왔다. 독일 고도 바이마르의 괴테, 실러의 동상에는 중동 난민들의 자태가 투사되면서 그들의 정체성에 대한 고민들이 쏟아져 나왔고, 미국 뉴욕 유니언광장의 링컨 동상은 전쟁 후유증에 시달리는 참전용사들의 얼굴이 덧씌워진 채 전장의 피비린내와 총성이 재현되는 악몽 같은 일상담을 시민들에게 전하는 매개체가 되었다.
보디츠코는 원래 폴란드에서 산업디자이너로 일했다. 공산당 정권에 신물을 느껴 1970년대 캐나다로 건너간 뒤 양극화와 폭력이 심화하는 사회 현실을 재구성하고 민주주의 전망을 스스로 모색하기 위한 ‘변형적 아방가르드’ 예술의 전망을 모색하는 데 애써왔다. 5전시장에 함께 전시된 노숙자 수레와 외국인 지팡이, 이방인의 도시를 위한 기기, 대변인(마우스피스) 등 ‘문화적 보철물’로 불리는 사회적 디자인들이 1980~90년대 벌인 사회적 실천의 모델들을 보여준다. 20세기 초 아방가르드 예술이 ‘부검도 적절한 애도도 하지 않은 채 생매장됐다’고 단정하는 작가는 1990년대 이후 투명인간처럼 배제되고 경시되는 노숙자, 난민 등 소외자들의 말문을 터주고 일반인들과 대화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데 역량을 집중해왔다.
말문 터주기에 대한 작가의 갈망은 전시의 마지막인 7전시장의 신작 <나의 소원>에서 한국 사회의 현실로 치환된다. <나의 소원>을 쓴 우국지사 백범 김구의 좌상에 원하는 나라에 대한 소망을 말하는 한국 보통사람들의 다양한 얼굴, 몸의 영상이 프로젝션 매핑 기법으로 겹쳐진 이 영상물은 감동적인 미디어아트다. ‘생존에 강박당하지 않고 꿈꾸는 나라를 만들어 달라’는 정리해고 노동자의 호소와 ‘사람의 목숨이 소중한 나라가 되기를 바란다’며 세월호 희생자 학생의 운동복을 펼쳐놓은 어머니의 절규가 백범의 좌대 위에 울려퍼진다. 투명한 존재처럼 치부되는 사람들에 대한 애정 어린 연대감이 얼굴과 손, 몸을 등장시키는 육감적인 영상과 디자인으로 표출되는 보디츠코의 작품들은 숱하게 널린 사회적 소재들을 외면한 채 시장 앞에 비틀거리는 한국 미술판에 던지는 죽비와도 같다. 10월9일까지. (02)3701-9500.
글·사진 노형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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