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발레리나를 본 적이 있던가. 상체를 드러내고 엉덩이를 바닥에 끌며 자신의 욕망을 한껏 표출하는 여인을. 지난 9~12일 엘지아트센터에서 열린 스페인국립무용단의 <카르멘>은 한국 발레 팬들에게 짜릿한 쾌감을 선사했다.
프랑스 작가 프로스페르 메리메의 동명 소설을 조르주 비제가 오페라로 각색한 <카르멘>을 놓고, 스웨덴 출신 안무가 요한 잉에르는 등장인물의 감정 묘사를 동물적 몸짓으로 변환시킴으로써 생동감 넘치는 모던 발레를 탄생시켰다. 골반을 한쪽으로 기울이는 불균형한 동작이나, 무게중심을 허리 아래에 둔 채 상체를 역동적으로 움직이는 등 클래식 발레에서는 볼 수 없던 장면이 묘한 감흥을 일으켰다.
카르멘을 연기한 수석 무용수 가요코 에버하트는 비제 오페라 <카르멘>의 유명 아리아인 하바네라의 선율을 타고 그대로 음악이 되었다. 오페라에서 소프라노 가수가 부르는 이 유혹적 노래가 바이올린의 음색으로 흐느끼는 사이, 관객들은 에버하트의 손짓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작곡가 마크 알바레즈는 원활한 극의 전개를 위해 비제의 음악을 재해석한 러시아 작곡가 로디온 셰드린
의 ‘카르멘 모음곡’(1967)에 새로 음악을 추가했는데, 이는 후반부로 갈수록 더욱 기괴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돈 호세의 혼란스러운 정서를 드러내는 파격적인 편곡은 작품의 표현 방식과는 잘 맞아떨어졌지만, 오페라의 애호가라면 반감을 가졌을 수도 있다.
개막에 앞서 안무가 잉에르는 여러 인터뷰를 통해 이야기의 전달자이자 각 등장인물의 내면을 드러내는 상징적 존재인 ‘소년’ 캐릭터를 설명한 바 있는데, 이 캐릭터 설정은 기대만큼 매력적으로 다가오지는 않았다. 한국인 무용수 박예지가 맡은 신비로운 소년은 후반부의 몇 장면을 제외하곤 장면 전환의 매개로 활용되는 데 그쳤다. 그보다는 돈 호세가 눈길을 끌었다. 특히 돈 호세 역할을 맡은 무용수 중 하나인 단 페르보르트의 섬세하고도 감각적인 춤은 극 전체에 긴장감을 불어넣었다.
9개 정삼각형의 이동형 무대장치를 활용한 미니멀한 무대는 크고 작은 ‘틈’을 만들며 관능적 분위기를 조성하기도 했다. 9개의 대형 거울을 앞에 두고 카르멘과 돈 호세가 춘 2인무는 이 작품의 하이라이트로 꼽을 수 있다.
1979년 스페인 국립 클래식 발레단이라는 명칭으로 창단한 스페인국립무용단은 1990년 안무가 나초 두아토를 예술감독으로 맞으며 혁신적인 변화를 맞았다. 현재는 파리 오페라 발레단 소속으로 활동하던 스타 무용수 출신 호세 카를로스 마르티네스가 이끌고 있다. 마르티네스가 무용단의 레퍼토리 확장을 위해 작품을 의뢰한 요한 잉에르는 모던 발레의 대가인 이르지 킬리안에게 영향을 받은 인물로, 현재 유럽에서 가장 촉망받는 안무가 중 하나다. 잉에르는 지난해 <카르멘>으로 무용계에서 가장 권위있는 상인 브누아 드 라 당스를 수상했다.
김호경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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