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네긴’을 연습 중인 황혜민·엄재용 부부. 유니버설발레단 제공
긴 세월을 돌아 공작 부인이 된 타티아나와 세상 풍파를 겪고 중년이 돼 다시 만난 오네긴. 지난날에 대한 애끓는 후회와 복받치는 사랑에 울부짖으며 괴로워하는 오네긴과 엇갈린 사랑의 타이밍에 절규하는 타티아나가 함께 추는 ‘회한의 파드되(2인무)’가 격렬하게 흐른다. 테크닉을 넘어 내면에서 흘러넘치는 감정 표현에 더욱 집중한 두 무용수의 손짓과 눈빛에서 격정과 고통이 휩쓸고 지난다. 숨소리마저 잦아든 연습실에는 오직 무언의 춤과 음악뿐이지만, 어떤 대사로도 표현 못할 아름답고 감동적인 ‘드라마 발레’의 정수가 넘실댄다.
<오네긴> 개막을 사흘 앞둔 21일 오후 서울 광진구 능동 유니버설발레단 연습실. 공연 전 마지막 연습은 어느덧 3막 끝으로 치닫고 있었다. 순수한 영혼을 가진 처녀 타티아나와 오만한 귀족 오네긴의 엇갈린 러브 스토리를 다룬 이 작품만 네 번째인 황혜민(39)·엄재용(38) 부부지만, 이번 공연을 준비하는 마음은 여느 때와는 다르다. 유니버설발레단의 간판이자 첫 현역 수석무용수 부부로 활동해온 두 사람은 이번 작품을 끝으로 ‘은퇴’를 선언했기 때문이다. 각각 2000년(엄재용)과 2002년(황혜민) 입단해 거의 반평생 둥지를 틀었던 발레단을 떠나는 마음이 오죽하랴.
“시원섭섭하다는 표현이 딱 맞는데, 섭섭하지는 않으려고 노력 중이에요. 사실 발레를 시작한 초등학교 3학년 이후 제 모든 삶은 무대를 위한 것이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에요. 먹고 마시고 잠자고 숨 쉬는 것까지. 잠시 발레를 떠난 삶을 살 수 있다는 데 설레어 보려고요. 하하.” 애써 밝게 답했지만 황혜민은 ‘마지막’이라는 말에 금세 눈시울을 붉혔다. “어쩌죠? 공연 때도 이러면? 요즘엔 일부러 발레 공연도 안 봤어요. 발걸음 안 떨어질까봐.”
아직도 ‘최고’라는 수식어를 달고 다니는 두 사람인데, 왜 지금 ‘은퇴’를 생각한 걸까. “정점에 올랐을 때, 멋지게 내려오자고 둘이 약속했어요. 은퇴는 아직 이르지 않냐는 소리 많이 듣죠. 하지만 세월은 이길 수 없어요. 스스로가 알아요. 이 시점을 지나면 하향곡선을 그리리라는 걸.” 엄재용의 말을 황혜민이 받는다. “원하는 만큼 춤췄고, 우리의 시대를 살았어요. 그거면 된 거죠. 후배들에게 자리를 비켜줄 때도 됐고요.”
강수진 국립발레단장, 문훈숙 유니버설발레단장, 김인희 서울발레시어터 단장 등이 한 시대를 풍미한 ‘발레 1세대’라면, 황혜민·엄재용은 김주원·김지영 등과 함께 한국 ‘발레 2세대’ 대표 주자다. 2세대의 시대도 어느덧 저물고 있다는 걸 둘은 쿨하게 인정한 셈이다.
<오네긴>을 은퇴작으로 삼자는 것은 이미 오래전에 둘이 내린 결정이라고 했다. “<오네긴>은 농익은 감성과 연기력을 보여줘야 하는 작품이에요. <지젤> 같은 클래식이 테크닉 위주라면, <오네긴>은 연기가 반 이상이죠. 연륜이 쌓여야 할 수 있는 작품이랄까. 강수진 단장님 등 유명 무용수들이 <오네긴>을 은퇴작으로 택한 이유기도 하겠죠.”(황혜민) “솔직히 말하면 테크닉의 한계를 좀 무마시킬 수도 있어요. 하하. ‘그랑 파드되’(고전발레에서 절정에 오른 장면에 프리마 발레리나와 남성 제1무용수가 추는 고난도 2인무)가 핵심인 <돈키호테>로 은퇴하라면 은퇴를 못 하겠죠. 하하하.”(엄재용)
엄재용은 고3 때 황혜민을 처음 만나 첫눈에 반했다. 입단 뒤 연애를 시작했으니 20년 가까운 세월. 둘은 말 그대로 ‘언제나 함께’였다. 함께 한 공연만 1천회가 넘는다. 가장 기억에 남는 무대는 뭘까. “발레단 들어와 첫 전막 커플 공연이었던 <라 바야데르>(2004)요. 전 첫 대작이라 너무 떨렸는데, 이 사람이 저를 이끌어줬어요. 믿음직스러워 호감도 급상승! 하하하.”(황혜민) “전 2005년이요. 휴가 때 둘이 마이애미에 갔는데, 갑자기 헝가리 국립발레단에서 주역 무용수들이 사고가 났다며 <돈키호테>를 할 무용수를 보내달라고 연락이 왔다는 거예요. 단장님이 저희를 보내셨는데, 포르투갈 투어라 졸지에 거기서 공연했어요. 하하하. 호흡을 잘 맞춰온 둘이 함께라 가능했던 듯해요.”(엄재용)
은퇴 무대가 끝나고 나면 지금과는 좀 다른 일상이 펼쳐질 것이다. 가장 먼저 뭘 하고 싶은지 물었다. “전 머리를 단발로 자르고 애시그레이색으로 염색할 거예요. 예약도 해놨어요. 발레 시작하고 30년 가까이 유지한 긴 생머리, 지겨워요. 너무 소박한가요? 헤헤.”(황혜민) “전 혼자 여행 가려고요. 1박2일 훌쩍. 한 번도 안 가본 곳으로.”(엄재용)
은퇴한다고 아예 무용을 떠나는 것은 아니다. 둘의 삶은 운명처럼 무용과 엮여 있다. “전 아이를 낳고 싶어요. 더 늦기 전에. 발레리나가 아닌 엄마·아내로서 행복을 꿈꿔요. 아이요? 절대 발레 안 시키죠! 하하하. 그러나 당장은 아니라도 결국 갈고닦은 재능을 사회에 나눠줄 길을 찾지 않을까요?”(황혜민) “전 후배들 가르치고 싶기도 하고, 안무를 하고 싶기도 하고…. 지금처럼 발레단에 소속돼 있진 않아도 좀 더 자유롭게 여러 무대에서 관객을 만날 거예요. 얼마 전 은퇴한 이승엽 선수 말을 빌리자면, ‘평생 발레만 하던 놈인데, 어떻게든 발레판에 있지 않을까’요.”(엄재용)
이제 두 사람 앞에 남겨진 건 오네긴과 타티아나의 ‘마지막 파드되’를 출 시간뿐. 24~26일 서울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에서 열리는 <오네긴> 공연에 두 사람은 세 차례(사흘 모두 저녁 프로그램) 무대에 선다.
유선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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