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남이, 김기표, 문영배, 신중현, 최이철(왼쪽부터)이 1973~74년 겨울에 함께 찍은 것으로 추정된다.
한국팝의사건·사고60년 (28) 1970년대의 정오, 슈퍼 그룹들 비상하다
1973년에서 1974년으로 넘어가는 겨울에 찍은 것으로 추정되는 한 장의 사진이 있다. 무대 위에서 다섯 사내가 자연스럽게 포즈를 취한 이 사진은 사내들의 얼굴을 알아볼 만한 한국 록 애호가라면 ‘이런 라인업의 슈퍼 그룹이 존재했던가’ 하며 흥분을 감추지 못할 만한 것이다. 다름아니라 그 주인공이 이남이, 김기표, 문영배, 신중현, 최이철이기 때문이다.
신중현이야 이 연재에서 여러 차례 언급했으므로 한번 더 언급하는 게 사족이 될 것이다. 하지만 다른 이들 역시 ‘울고 싶어라’의 가수 이남이, ‘내 마음은 당신 곁으로’ 등의 인기 작곡가 김기표, ‘한동안 뜸했었지’, ‘장미’(이장희 작사 작곡)의 주인공 최이철 하는 식으로 조금만 부연하면 금방 알 만한 이들이다. 한 마디로 당시 쟁쟁한 실력을 갖춘 연주자이자 이후 1980년대까지 가요계에 굵은 족적을 남긴 음악인들이라고 요약할 수 있다.
이들 멤버의 팬이라면 타임 머신이라도 타고 가서 연주를 듣고 싶은 심정이겠지만, 아쉽게도 이 슈퍼 그룹은 단명하여 전설로만 남았다. 본인들의 증언을 종합하면, 타워호텔 고고클럽에서 당시 업계 용어로 ‘비즈니스 제의’가 들어와서 몇 달 간 잠시 뭉쳐 연주한 것이었다. 당사자들도 정확한 그룹 이름을 기억하지 못하는, 그러니까 뜻을 같이해 정식으로 결성한 밴드가 아닌 일시적 프로젝트였던 셈이다.
하지만 이는 슈퍼 그룹 사운드의 비상을 예시하는 상징적 스냅 사진이었다. 짧은 비즈니스 이후, 세 개의 슈퍼 그룹이 갈라져 나왔다. 신중현과 이남이는 김호식(뒤에 권용남으로 교체)을 영입해 ‘신중현과 엽전들’을 결성했고, 김기표와 문영배는 이태현, 손학래, 최헌(‘오동잎’의 바로 그이!)과 함께 ‘검은 나비’를 만들었으며, 최이철은 김명곤, 이철호 등과 의기투합해 ‘서울 나그네’를 결성했다. 이 중 ‘서울 나그네’는 ‘사랑과 평화’로 개명한 뒤 1970년대 말 빅 히트를 기록한 반면, ‘신중현과 엽전들’ 그리고 ‘검은 나비’는 각각 ‘미인’과 ‘당신은 몰라’를 통해 곧바로 가요계를 뒤흔들었다.
1974년 발표된 ‘미인’과 ‘당신은 몰라’는 김정호의 ‘하얀 나비’와 함께 1975년 전반기 인기가요 차트 상위권을 주름잡았다. ‘검은 나비’의 ‘당신은 몰라’는 ‘히 식스’의 1972년작을 리메이크한 것이었지만, 최헌이 노래를 했다는 점에서는 변함이 없었다. 최헌의 짙은 허스키 음색은 ‘검은 나비’의 노련한 연주와 결합하면서 더욱 탄탄한 짜임새를 갖추게 되었고 품격 있는 발라드로서 두고두고 애청되고 애창되었다.
성별과 세대와 도농(都農)의 경계를 가로지르며 히트한 ‘미인’은 삼천만의 애창곡으로 불릴 정도로 엄청난 인기를 구가했다. 신중현이 솔로 가수의 작편곡가로서 대박을 기록해왔던 데 비해 자신의 그룹으로는 가요계에서 큰 재미를 보지 못했던 것을 상기하면 자신이 보컬까지 도맡은 ‘미인’의 성공은 각별한 것이었다. ‘더 멘’ 시절 풍성하고 진보적인 사운드를 펼치다 3인조의 단순하고 응축적인 사운드로 변신하여 거둔 성과란 점에서도 의의가 있다. 무엇보다 ‘미인’이 신중현 개인 차원을 넘어 각별하다면, 여러 평자들이 높이 평가해왔듯이 가야금의 농현(弄絃)을 응용한 기타 주법과 강렬한 하드 록 사운드를 결합해 한국적 록의 청사진을 제시했다는 점에 있을 것이다.
1969~71년 미8군 무대 출신 그룹들이 등장해 생음악 살롱과 시민회관을 거점으로 활약하며 한국 팝 혁명의 시작을 알렸고, 1971~73년 신구의 그룹 사운드들이 조화를 이뤄 지하 고고클럽에서 절치부심하며 ‘한 밤의 지하 레볼루션’을 도모했다면, 1974~75년은 지하 활동을 이어가는 동시에 다시 양지로 솟아올라 가요계의 지축을 뒤흔든 시기였다. 슈퍼 그룹도 탄생하고, 구미(歐美)의 어법을 자신들만의 것으로 소화하면서 한층 성숙된 한국 팝·록이 빚어내던 시기였다. 하지만 그 시기는 1970년대의 정오의 문턱을 넘지 못했다. 불행히도, 아니 공분을 금치 못하게도 자의가 아니라, 타의에 의해서 말이다. 뒤에 얘기하자.
이용우/대중음악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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