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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음악·공연·전시

70년간 네 여인을 따라다닌 역사의 유령은…

등록 2017-12-06 05:01수정 2017-12-06 21:19

-임흥순 전시 ‘우리를 갈라놓는 것들’-
분단 역사 겪은 할머니들 일대기
‘다큐+연출극’ 형식 영상으로 조명

상징적 영상에 주력하다보니
전시 난해해 정서적 감흥 적어
신작 영상물 <우리를 갈라놓는 것들>의 일부. 전시 주인공 중 한명인 고계연 할머니가 지리산 빨치산 시절의 쓰라린 기억들을 환각 속에서 돌이켜보는 장면이다. 할머니의 소녀 시절 역을 맡은 배우가 빨치산들의 주검이 흩어진 지리산 계곡을 배회한다.
신작 영상물 <우리를 갈라놓는 것들>의 일부. 전시 주인공 중 한명인 고계연 할머니가 지리산 빨치산 시절의 쓰라린 기억들을 환각 속에서 돌이켜보는 장면이다. 할머니의 소녀 시절 역을 맡은 배우가 빨치산들의 주검이 흩어진 지리산 계곡을 배회한다.
1948년 5월10일. 대한민국 정부 역사에는 초대 국회의원 선거일로 기록됐지만, 남한 단독정부 수립을 위한 선거였기에 한반도 분단을 공식선포한 날이 되었다.

2년 전 베니스(베네치아) 비엔날레에서 한국 여성 노동자들의 삶을 담은 <위로공단>으로 은사자상을 받았던 영상작가 임흥순(48)씨는 3개 스크린이 맞붙은 신작 <우리를 갈라놓는 것들>에서 5·10선거를 전혀 낯선 각도로 바라본다. 그가 먼저 짚은 건 선거 날짜를 정한 배경에 개기일식이란 자연현상이 얽혀 있다는 비화다. 작품 도입부는 구름이 일렁거리는 낮 하늘에 달이 태양을 덮치고, 암전된 하늘을 바라보는 여인의 뒷모습을 클로즈업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스크린 자막은 이 광경이 선거일 전날 상황임을 알려준다. “…9일은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을 위한 선거일로 공포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날이 마침 일식이 있는 날이라고 뒤늦게 알려져 선거는 하루 연기된 10일로 하기로 되었고…9일에는 아시아 대부분 지역에 개기일식이 일어나 세상이 온통 어둠에 잠겨버렸다.”

지난달 30일부터 서울 소격동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5, 7전시장에서 시작한 임 작가의 전시 ‘우리를 갈라놓는 것들’은, 개기일식처럼 칠흑 같은 분단 세월의 속내를 이 땅 할머니들의 삶으로 은유한다. 70년 이상 남북의 사람들을 유령처럼 옥죈 20세기 분단의 역사가 할머니 네 명에게 어떤 흔적과 영향을 남겼는지를 영상과 소품·유품·배우의 연기로 되살려 이들의 삶을 추체험해보라는 ‘다큐+연출극’ 형식의 영상 작업이다.

지난달 28일 열린 전시장 간담회에서 임흥순 작가가 나와 설명하고 있다. 그의 뒤에 보이는 것은 고 김영일 할머니가 생전 손수 짰던 자수작품들이다. 구술과 대화를 바탕으로 작업했다는 작가는 “몸과 마음으로 할머니들의 삶을 경험하는 과정들은 나 자신을 다시 만들어가는 굉장히 소중한 시간들이었다”고 털어놓았다.
지난달 28일 열린 전시장 간담회에서 임흥순 작가가 나와 설명하고 있다. 그의 뒤에 보이는 것은 고 김영일 할머니가 생전 손수 짰던 자수작품들이다. 구술과 대화를 바탕으로 작업했다는 작가는 “몸과 마음으로 할머니들의 삶을 경험하는 과정들은 나 자신을 다시 만들어가는 굉장히 소중한 시간들이었다”고 털어놓았다.
전시의 주인공들은 분단과 이념의 역사에 휩쓸리며 생긴 상처를 홀로 견디며 살았다. 고 정정화(1900~1991) 할머니는 1920년 중국에 건너가 26년간 조선을 오가며 임시정부의 자금과 정보를 전했던 독립지사다. 분단 뒤엔 북의 열사릉에 묻힌 남편과 떨어져 이산의 삶을 살아야 했다. 올해 타계한 김동일(1932~2017) 할머니는 제주 4·3항쟁에 참여해 한라산 사람이 되었다가 일본으로 밀항해 현지에서 평생을 보냈다. 고계연(85) 할머니는 한국전쟁 당시 아버지와 오빠, 동생을 찾으러 지리산에 올라가 3년간 빨치산으로 살았다. 결국 생포돼 광주에 정착한 뒤엔 낚시를 하며 말년을 추슬렀다. 10대 때 한국전쟁 피난살이를 했고, 20대 때 베트남 전장에 위문단으로 갔다가 남편을 따라 이란에 정착했던 이정숙(73) 할머니는 80년대 이란·이라크전의 포연 속에서 떨어야 했다.

<위로공단>의 시적인 영상으로 유명해진 임 작가는 신작에서도 할머니들의 인생을 다큐 문법으로 풀어놓지 않는다. 5전시장의 영상과 7전시장에서 틀어주는 이정숙 할머니의 사연을 담은 근작 <환생>에선 할머니들 삶 주변의 사물들과 학살·생포·처형·폭격·배신 등에 얽힌 과거의 환각들을 주로 살려낸다. 그들의 지난 기억은 배우들의 상징적인 몸짓, 이미지로 어렴풋이 드러날 뿐이다. 세수를 하면서 물에 얼굴을 담근 고계연 할머니가 가라앉는 나룻배와 주검들이 널린 지리산 계곡을 방황하는 환각을 보는 장면이나, 얼굴에 상처를 입은 김동일 할머니 역을 맡은 배우가 얼굴에 천조각을 드리우고 제주석물원의 사천왕상 주위를 기웃거리는 장면 등이 그러하다.

5전시장의 뒤켠 공간에는 영상물 주인공인 할머니 4명의 유품, 애장품 등을 진열한 기억의 방이 있다. ‘과거라는 시를 써보자’는 제목이 붙은 방 들머리에는 4·3제주항쟁에 참여했다가 일본에 밀항한 뒤 거거기서 평생을 보낸 고 김동일 할머니의 옷가지들을 걸어놓았다. 관객들은 다섯줄로 내걸린 옷가지들을 스쳐 지나가면서 고인의 삶과 체취를 느끼게 된다.
5전시장의 뒤켠 공간에는 영상물 주인공인 할머니 4명의 유품, 애장품 등을 진열한 기억의 방이 있다. ‘과거라는 시를 써보자’는 제목이 붙은 방 들머리에는 4·3제주항쟁에 참여했다가 일본에 밀항한 뒤 거거기서 평생을 보낸 고 김동일 할머니의 옷가지들을 걸어놓았다. 관객들은 다섯줄로 내걸린 옷가지들을 스쳐 지나가면서 고인의 삶과 체취를 느끼게 된다.
아쉬운 건 이야기의 힘이다. 작가는 10여년 전부터 소외의 표상으로서 ‘떠도는 유령’의 이미지를 천착해왔다. 분단 자체나 분단에 의해 고통받고 침묵하는 민중, 관찰하는 작가 자신까지 유령으로 덧씌우고 영상 속 특정 사물이나 전시장의 배, 사천왕상 신상 같은 전시장 소품들에도 심령적이고 중의적인 의미망을 덧붙여놓았다. 그러나 작가가 유령으로 재현하는 역사 쓰기에 집착하는 까닭에, 전시는 난해하고 공허해진다. 주인공 할머니들의 실제 삶에 얽힌 이야기들이나 지인들의 객관적인 증언, 고인의 활동 공간 등을 담은 다큐 영상의 정보들은 작품에 잘 어울리지 못하고 서사적인 응집력을 약화시킨다는 느낌을 준다. 강홍구 작가는 “관객과 함께 논의하며 전시 틀을 잡은 과정은 공감할 만한데, 드넓은 전시공간에서 상징적인 영상에만 주력하다 보니 이야기의 밀도가 떨어져 보이고 단번에 와닿는 정서적 감흥이 별로 없다”고 지적했다. 내년 4월8일까지. (02)3701-9500.

글·사진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사진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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